
양육이라는 단어는 육아양육이라는 표현처럼, 신생아와 같은 어린 자녀를 키울 때 쓰는 용어입니다. 그래서, 청년 또는 장년에게는 양육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실제로 20세가 넘으면, 스스로도 다 자랐다, 다 컸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도움은 필요할지 몰라도 돌봄을 받을 필요성은 느끼지 못합니다. 오히려, 누군가 “돌보아 준다” 혹은 “양육하고자 한다” 하면 겸연쩍어 합니다. 그러나, 크리스천들에게 양육이라는 단어는 나이에 상관없이 평생 듣고 살아야 할 용어입니다.
에베소서 6장 4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이 말씀은 신앙의 가장인 아버지들이 자녀를 양육할 때, 그들의 육신의 성장만을 신경 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적인 면, 신앙적인 면에 있어서도 성장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신앙양육은 자라나는 자녀들에게 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연령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필요한 일입니다.
바울도 이미 어엿한 목회자가 된 디모데를 여전히 영적으로 양육하고자 했습니다. 디모데를 직접 만나고 싶었으나, 상황적으로 여의치 않았던 사도 바울은 그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어, 권면하고 훈계하였습니다. 그러한 권면과 훈계가 담긴 성경이 바로 디모데전후서입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얼마나 사랑하며 돌보고자 했던지, 당시 위장이 좋지 않았단 디모데에게 포도주를 조금 쓰라고까지 권면할 정도였습니다. 원래, 바울의 서신서들은 한 개인에게 주어진 편지임과 동시에 특정 교회의 모든 성도들을 향한 권면이 편지였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아주 개인적인 권면을 편지에 담기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영적 아들 디모데를 양육하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신앙성장에는 분명히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양육이 필요합니다. 단순히, 미디어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유명 설교자나 개인이 선호하는 사역자들의 설교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이기적이고 편협적이어서, 본인이 듣고자 하는 것 만을 듣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누군가의 하는 말을 선포한다는 것은 그가 말하는 요점과 취지가 자신의 사상과 가치관과 부합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자신은 유튜브를 통해 다양한 설교를 접하며, 많이 배우고 있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사실은 자신이 원하는 가르침과 선생을 찾아다니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문제는 자신의 생각과 같은 분들의 설교는 결국 자신의 생각을 지지해주는 협력자의 역할을 할 뿐, 사실상 배우는 것이 전혀 없을 수도 있다 라는 사실입니다.
신앙양육은 내가 몰랐던 부분, 잘못 알고 있었던 부분을 일깨워주고 설득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를 양육할 때, 때로는 엄하게 야단을 치고 훈계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양육은 계속적인 지지와 호응 동의를 얻는 것이 아니라, 내가 틀렸음을 깨닫는 찔림과 내가 전혀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의 떨림이 공존하는 고도의 영적 성장 메커니즘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유튜브와 같은 미디어를 통한 신앙적 가르침은 자신의 취향, 사욕을 따라 취사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골라 듣고, 듣기 싫으면 그만 듣는 사람은 결코 온전한 양육을 경험할 수 없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도의 영적 양육에는 일방적인 가르침을 드는 것보다 아버지나 목자의 돌봄이 필요합니다. 사랑으로 하는 훈계가 필요합니다. 또한, 교회의 지체로써, 상처받는 일이 있어도 믿음의 형제 자매들과의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그 속에서 때로는 격려와 위로 배움을, 때로는 크고 작은 갈등과 오해 속에서 생기는 생채기를 통해 강해져야 합니다. 무엇보다 목회자의 권면과 조언, 소그룹 목자의 돌봄과 조언이 필요합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양육되고 있습니까? 양육되어, 양육하고 있습니다. 양육하면서도 동시에 양육 받고 있습니까? 아니면, 혼자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아직도 코 흘리고 주위를 어지럽히는 영적 어린아이는 아니십니까? 우리 모두 평생 양육 받아 영적으로 계속해서 자라가야 하는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