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디오 빌라도는 로마 제국이 파견한 이스라엘 총독이었다. 현재 군 계급으로 치면, 백부장이 위관급, 천부장이 영관급 장교였다면 총독은 최소 장군 이상의 위치와 권력을 가진 로마의 최고위층 간부이자 정치인이었다. 총독의 역할은 제일 먼저 로마의 속국들의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는 일이었다. 두 번째는 속국의 공공 안정을 위해 공정한 재판관, 행정관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로마 적대국으로부터 속국을 향한 공격을 막아내는 국방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해서 속국의 총독에게 주어진 권력은 황제에 버금가는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로마의 중앙정부에서 해외로 발령되었다는 것은 로마 권력의 중심부에서 밀려났다는 것을 뜻했다. 게다가 이스라엘은 험지 중의 험지였다. 로마에서 거리상으로도 멀었고 정치적으로 안정이 될 수 없는 땅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팔레스타인 지역은 지정학적으로, 민족적으로, 종교적으로 시위와 폭동, 전쟁이 자주 일어나며 정치적 이슈가 끊이지 않는 곳이다. 하지만 위기가 기회라고 이스라엘의 총독 자리는 야전 사령부와 같이 인생역전을 노릴 수도 있는 곳이었다. 골치 아픈 문제를 잘 처리한다면 중앙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빌라도는 로마로부터 수천 킬로 떨어진 이스라엘로 오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야”, “내가 성공해서 기필코 로마로 돌아가리라!”, “내가 이 민족을 완전히 장악하였다는 평가를 들으리라 ”, “나를 밀어낸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어야지” 빌라도가 이런 생각을 하며 예루살렘에 왔다면 그는 이미 실패한 것이었다.

빌라도가 보기에 이스라엘이 로마에 비해 미개하고 어리석어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곳은 하나님이 택한 땅이었다. 이제 빌라도는 하나님의 시나리오 안으로 들어서는 것과 같았다. 사실 좌천 되어 험지로 밀려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복 된 삶의 자리로의 입성이 시작될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로마에서 누리던 부귀영화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어떤 나라의 총독이 성경에 기록되는가? 로마에서 절대 권력을 누리던 어떤 왕도 하나님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모두가 역사에서 바람처럼 사라져버릴 권력의 중독자들일 뿐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시기에 이스라엘 총독으로 파견된 빌라도는 다르다. 그는 하나님의 역사 한 가운데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삶의 경험과 지혜를 총동원해 역사적 선택을 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이 영원한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 또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인지?의 구원의 문제와도 맞닿아 있었다. 그가 생각한 삶의 가치가 결국 그의 결정이 된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고 인생을 어떻게 살았는가? 그에 대한 평가는 성경 이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유대 철학자 필로는 본디오 빌라도를 "거칠고 악의가 있으며 잔인한 인물"이라고 묘사했다. 로마 역사학자 요세프스도 "빌라도가 이스라엘에 부임하자 곧 유대인들을 적대시하였다"고 기록했다. 그는 저항하는 유대인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였고 학살했다. 유대인들이 신성시하는 성전에 로마황제 상을 세워 갈등을 부추겼다. 유대인들의 헌금을 유용하여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는 신에 대해 진실하지도, 사명에 대해 성실하지도, 사람에 대해 자비하지도 않았다. 결국 돈과 권력에 눈이 먼 악인에 불과했다.

과연 그가 자신을 이스라엘로 보낸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면 그렇게 살았을까? 로마에서 이스라엘로 가는 머나먼 여정에서 그가 이 모든 진리를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어디에서든 자신에게 맡겨진 소임에 충실하고 진실했다면 어땠을까? 가난하고 무지하더라도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할 줄 알았다면 어땠을까? 험지가 아니라 성지로 가는 것이란 것을 알았으면 어땠을까?

그의 삶의 태도는 달라졌을 것이다. 결국 옳은 길을 걷고 옳은 판단을 내리고 믿음대로 살았을 것이다. 그는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다. “나는(빌라도) 그에게서(예수님)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요19:6) 하지만 그는 정의를 수호하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 자신의 사명을 저버렸다. 그 이유가 분명하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막15:15) 그는 옳은 길을 걷기보다 자신의 자리와 명예를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한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그에게 싸인을 주셨다. “이는 그가(빌라도) 그들의(대제사장들과 장로들)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더라,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마27:18-19)

하지만 이러한 주변사람들의 노력이 그의 삶의 가치를 뒤바꾸지 못하였다. 결국 사람은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 것이 나오게 마련이다. 좋은 교훈, 좋은 교육이 옳은 선택을 하도록 돕지는 못한다. 인간은 악한 행실을 회개하고 선한 인간이 되어야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것이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주니라”(요19:16) 그는 이런 결정으로 민란이 발생하려는 위기를 모면 했다.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그의 삶의 매 순간의 결정이 이런 식이었을 것은 자명하다. 이것은 순간의 선택이 아니라 그의 삶의 방식이었다.

그는 AD26~36년까지 10년간 총독의 지위를 유지하였지만 결국 학살의 만행들이 밝혀서 로마에서 징계를 받고 비참한 말로를 걸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우리는 모든 결론을 다 알고 있다. 만약… 내가 빌라도라면 나는 어떻게 살았을 것인가?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나?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오늘 우리는 빌라도처럼 이스라엘 험지와 같은 “세상”에 보내졌다. 매 순간 선택하며 살아간다. 내가 빌라도라면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5:8)

최민기 목사/선교사

중남미 과테말라에서 선교사(SEED선교회)로 헌신하며, 세계한인재단(WKF) 과테말라 선교본부장을 맡고 있다. 한국과 미국에서의 풍부한 목회경험(예장백석)과 선교학박사로서의 학문적 바탕을 선교현장에 적용하며 구현하고 있다. 큐티 전문강사로도 활발히 활동하며 큐티교재를 집필하였고, 라디오방송 큐티프로그램 진행자, 기독국제학교교사 등 기독교의 사회적 영향력 확산에도 적극 참여해 왔다. 저서로는 [진심이 열심을 이긴다](쿰란, 기획출간, 2024)가 있다. 현재 사랑하는 아내 양정현 선교사와 사춘기 세 딸(주화, 주빌리, 요벨)과 함께 과테말라에 거주하며 선교적 삶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