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미션대학교 윤임상 교수
(Photo : 기독일보) 월드미션대학교 윤임상 교수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대학교 신약성경의 세계적인 석학 이자 초기 기독교 연구의 최고 권위자였던 레리 허타도(Larry W. Hurtado, 1943-2019) 교수가 쓴 책 “처음으로 기독교인이라고 불렸던 사람들”에 보면 서기40 년경에 기독교인이 1000명 가량 이었다고 합니다. 이어 서기 100년에는 7000에서 일만명 가량되었고 서기 200 년경에는 이십만 명 가량, 그리고 서기 300년에는 500-600 만명이나 되는 것으로 추정합니다.

한편, 기독교리 집단 혹은 공동체들이 존재했던 지역을 조사한 결과 최근 추정치에 따르면 서기 100 년경에는 100여 곳이 있었고 서기 200 년경에는 200- 400여곳이 있었다고 합니다. 초기 기독교 작가 터툴리안( Tertullian, 160-240)이 쓴 책“To Scopula” 라는 책에 보면 삼 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모든 도시에서 대다수를 차지할 만큼 기독교 신자들이 많았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시대적인 일반적인 상황을 고려할 때 필자는 이 통계들은 믿기가 쉽지 않은 현상이라 생각됩니다. 로마의 기독교 역사를 우리가 잘 알듯이 AD 67년 이후 313년 밀란 칙령에 이르기까지 약 250년 가까이 로마의 지도자들이 기독교인들을 향한 혹독한 핍박은 하늘을 찌르듯 정말 무섭고 떨렸습니다. 하나의 예로 3세기 초, 데시우스 황제(Decius, 201-251)는 로마 황제 에게 절하는 사람들에게 “리벨리우스”라는 패를 주게 하여 만약 그 패를 소유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무조건 처형을 시키는 기독교 말살 정책을 펼쳤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이때 상류층 사이에 기독교를 연구한 비평가들은 조롱과 비판이 무성했다고 합니다. 한편, 2세기 초 로마의 작가 수에토니우스(Gaius Suetonius Tranquillus, 69-130)는 “사악한 신종 미신”이라 표현하며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단적으로 보이며 기독교를 싸집아 비난했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기독교는 위의 통계를 보듯 핍박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그 세력은 점차 증가했던 사실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이룰 수 있었던 중요한 요소는 먼저 일 세대 크리스천들이 그리스도를 단순히 따르는 펜이 아닌 제자로 변화되었고, 단순히 행동이 아닌 정체성이 바뀐 참 제자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런 신앙 핵심이 기초가 되어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을 위해서라면 그들의 목숨을 초계처럼 여기며 복음을 향한 무한 질주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이 십자가 복음 정신에서 고백 되는 하나의 표현을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유추해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후 4:16-18”

이 말씀은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한 간절한 권고 중 하나로 현재의 고난이 장차 받게 될 큰 보상에 절대 비교될 수 없다는 피눈물 나는 호소로 필자에게는 비추어 집니다. 그들이 이런 소망을 확고히 붙들고 있었기에 핍박이 심하면 심할수록 더욱더 복음의 신앙고백이 확고해지며 기독교 인구가 확장되어 갔던 것입니다.

이 말씀(고후4:16-18)을 가지고 한국의 진선미 작곡가가 모텟 형태, 즉 텍스트 변화에 음악의 변화 형식으로 두 개의 튠을가지고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여 곡을 만들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Z-u9pZKrg

처음 16절의 중심 내용인 “비록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더라도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날로 새로워 진다”는 대조법의 원리를 짦은 리듬으로 펼쳐가며 여성과 남성이 교차하면서 가사의 중요성을 나타내려 합니다.

이어 17절 18절을 가지고 새로운 튠을 통해 표현합니다. 조성은 변화 없이 그대로 같은 텍스트를 가지고 전개합니다. 하지만 중심되는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보이지 않는것은 영원함이라” 는 중심 내용을 두 번이나 반복하며 클라이막스를 이루며 종결을 합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이 찬양을 통해 시련과 환란을 통한 역설의 축복을 묵상하게 됩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눈여겨보며 생각되어야 할 사실은 환난과 핍박이 나에게 있을 수 밖에 없다는 맹목적 입장을 벗어나 그러한 역경 뒤에 올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들을 바라보는 안목을 우리는 갖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모든 믿음의 선진들이 가졌던 공통적인 신앙 안목이었고 초기 기독교를 세워가는 리더자들과 당시 모든 성도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던 신앙의 닻(앵커, Anchor)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