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상처를 잘 받습니다. 특히 말로 인한 상처가 큰 데, 한 가지를 꼽으라면 미국에 와서 첫 한인교회에서 사역하다 받은 상처입니다. 저는 찬양대 지휘를 맡기로 하고 미국에 왔습니다.
음악목사가 꿈이었고 고등학생 때부터 교회와 학교 중창단, 나중에는 전문 합창단원으로 활동하며 유명 지휘자에게 지휘 사사를 받았기 때문에 나름 성과와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찬양대를 맡고 보니 총무와 반주자가 이유 없이 저를 왕따 시키고 따라 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렇게 아주 힘든 시간을 보낸 6개월 만에 저는 결국 목사님께 찾아가 사임서를 제출해야 했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네 잘못이 아니다. 뒤에서 누가 조장한 거야!" "그게 누구죠?" "아무개 다~", "네에?"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20대 순수한 청년 지휘자로, 사람들의 칭찬만 받다가 처음으로 인간적으로 큰 배신감과 회의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 정신적 스트레스가 얼마나 컸던 지, 그 여파로 교통사고가 나서 죽을 뻔하기도 했습니다.
그분은 제가 교회에 왔을 때, 문 밖에 까지 나와 제 손을 잡고 저를 반갑게 맞아주면서 "전도사님이 우리 교회에 오셔서 얼마나 기쁜 지 몰라요~" 크게 환영해 주었고 늘 미소로 저를 대하던 분이었기에 도저히 믿을 수 없었고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는 뒤에서 총무와 반주자를 집에 초대해 융숭한 대접을 하면서 마치 도마 위에 생선처럼, 저를 찢고 난도질하며 제 이미지를 상하게 하여 쫓아내려 했던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용서하고 세월이 흘러 되돌아보니, 그때 상처가 저로서는 큰 예방주사가 되었습니다. 이후에 더 큰 상처를 많이 받았지만 쉽게 이겨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딸을 지휘자로 세우고 싶었던 그 아비는 제가 나타나서 자리를 빼앗겼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제가 미웠겠습니까?
저는 본의 아니게 상처를 준 사람이었습니다. 상처는 상대적입니다. 그래서 상처 안에 머물러 있기만 하면 희망을 볼 수 없습니다. 상처는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디딤돌로 삼을 때만 그 의미가 생깁니다. 우리 주님처럼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