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는 손잡이가 없다" 김문수 목사님이 새벽예배 때 인용한 문구이다. 크고 무거운 여행가방에도 손잡이가 있고, 작은 도시락 가방에도 손잡이가 있다. 대다수 모든 것들에는 사용하기 편하게 손잡이가 있다. 그런데 십자가에는 손잡이가 없다.
딸아이가 수단난민학교를 섬기기 위해 이집트로 떠났다. 이번에는 아내가 동행해 주기에 마음 편하게 보낼줄 알았는데 마음 한편이 불편하다. 떠난 지 며칠이 되었다고 벌써 아내의 빈자리와 함께 딸아이가 각종 물품들을 정리하려고 거실 가득 펼쳐 놓았던 가방들마저도 그립다.
솔직히 딸아이가 직장과 미국의 삶을 내려놓고 수단난민학교를 섬기러 떠난다고 할 때는 자랑스러웠다. 딸아이의 결단에 내 믿음을 얹으려는 얄팍함으로 우쭐댔다.
그런데 시간이 길어지면서 불안한 마음이 살짝 스며들더니 이제는 식탁에 앉아 "난민 아이들이 보고 싶다"는 말조차도 거부감이 든다. 왜 그럴까? 딸아이의 미래를 생각해서 일까? 아니면 딸 아이에 대한 기대감 때문일까?
딸아이를 인간적으로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도 시간이 지나면서 이렇게 흔들리는데 누구보다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데 선교지로 떠나야 하는 딸아이의 마음은 어떨까?
얼마나 많은 고민과 생각으로 힘들까? 카이로의 삶의 힘듦과 외로움을 알면서도 그곳으로 가는 발걸음이 갈등이었을까? 그럼에도 저항할 수 없는 끌림이 있는가 보다.
자기 스스로 디자인하고 사용하려는 손잡이가 없는 어떤 끌림이 이끌고 있기에 이번에도 그곳에 갔나 보다.십자가는 손잡이가 없다. 내가 죽어 영혼을 살리는 십자가는 손잡이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님도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어지게 하소서"하면서 십자가로 가셨나 보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나와 모든 인류를 구원해 주셨다. 나이가 들면서 교회도 사역도 심지어 내 인생도 스스로 핸들링 (handling) 하려고 하는 내 모습을 본다. 얄팍한 경험을 가지고 조정 하려고 한다. 내 십자가에는 손잡이가 많다. 그래서인지 날마다 십자가를 진다고 고백해도 내 안에 생명력이 안느껴지는 이유가 아닐까?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에 순종할 때 인류를 살리는 구원의 문을 열어 주었듯이 순종이 십자가에서 내가 만든 손잡이를 없애는 길이다.
주님! 오늘도 계속 순종할 수 있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