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현모(서울대학교 치의학대학원 분자유전학-약리학교실 교수)
류현모(서울대학교 치의학대학원 분자유전학-약리학교실 교수)

스콧 알렌(Scott D. Allen)은 지역사회 개발과 빈곤퇴치 및 정의 구현에 평생을 헌신해 온 기독교 운동가이다. 최근 저서 <사회정의는 성경적 정의인가?>의 서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최근 들어 어떤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복음주의 교회의 중심부까지 깊숙이 침투하고 있다. 이것은 지지자들에게 '사회정의(social justice)'라고 불리며, '다양성(Diversity)', '평등(Equality)', '포용(Inclusion)'에 관한 책임과 연관되어 있다. 앞 글자를 따서 DEI 라고도 불리며, 최근 미국의 기업, 학교, 교회 등의 채용 및 인사기준으로 채택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나라의 초중고등학교 "2022 교육과정개편"의 내용과 최근 "국회발의 중인 법안"에서도 지속적으로 강조되고 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그리스도인들은 정의에 대해 깊은 책임을 느낀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관 교육기관인 '콜슨'의 대표인 존 스톤스트리트는 그들이 사용하는 정의, 다양성, 평등, 포용의 뜻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의미가 다름을 말한다. 요즘과 같은 기독교의 기준들이 세상의 주류문화에서 밀려나고 있는 탈기독교(post-christian) 시대에는 세상의 위세를 입은 세속적 세계관이 복음주의 교회 속에도 깊이 침투해서 마치 주인인 양 행세하는 경우가 많다. 성경적 정의의 뜻을 혼란스럽게 하는 근래의 사상들을 '사회정의'로 규정하고 이들에 대한 정의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칸트의 계몽주의 이후 니체-마르크스-그람시-푸코 같은 무신론 철학자와 운동가들의 생각이 축적되어 만들어진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주의이다. 해체주의는 기존의 주류문화가 주장하던 단어의 뜻의 해체를 시작으로 기존 질서를 비판하며 약자의 정체성을 가진 집단을 보호하는 것을 정의라 규정한다. '비판이론(critical theory)', '문화막시즘(cultural Marxism)',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 '교차성 이론(intersectionality)'등도 이러한 '사회정의 이념'으로 포괄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정의는 마르크스의 이론과 연결되어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는 노동을 통해 생산된 이익을 자본가나 지주들이 너무 많이 가져가기 때문에 약자인 노동자와 농민이 빈궁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약자들이 혁명으로 봉기하여 세운 국가나 공산당이 분배에 관여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한 재화를 골고루 나누면 모든 사람이 전부 잘 살 수 있다는 것이 마르크스가 주장한 이상주의적 경제체제이다. 그러나 이것은 '적게 일하고 많이 분배받고 싶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간과한 순진한 생각이었음이 20세기 중반 60여 년 동안의 소련, 중국, 동구, 북한의 실험적 공산주의와, 중남미 아프리카의 실험적 사회주의에서 명확하게 드러났다. 타락한 인간은 자기 이익과 무관한 노동에 힘을 쏟지 않고, 자신의 필요보다 항상 더 많이 가지려는 탐욕을 보이기 때문에, 매년 생산량은 감소하는 반면 분배의 요구는 증가하여 경제적 파탄을 맞게 된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는 가난한 자들을 돕기보다는 오히려 훨씬 더 많은 해를 끼침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스콧 알렌은 경제적으로 낙후된 후진국 복음 전파에 참여했던 초기에는 자신이 마르크스의 사회정의에 오염되어 있었음을 스스로 밝혔다. 피선교 국민을 서양인의 도움 없이는 가난을 극복하지 못할 무력한 존재로 보았으며, 이런 시각은 시혜자인 자신(선교사, 교회)에게는 온정주의와 죄의식을, 수혜자(피선교인)에게는 의존성과 권리의식을 유발했다고 고백한다. 그는 복음주의 교회에서 사회정의를 외치는 사람에게 "빈곤 계층에게 스스로 빈곤을 떨칠 힘을 주길 진심으로 원한다면, 가장 유익한 도구는 성경적 진리와 성경적 자비이다. 빈곤의 궁극적 원인은 부조리한 체제가 아니리, 타락한 인간의 문화 속에 작용하는 사탄의 속임수에 있다."라고 전한다. 

하나님은 토기장이가 그릇을 빚듯 목적을 가지고 개개인을 창조하신다. 우리가 태어난 가정, 사회, 도시, 국가, 인종 등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개인에 부여하신 것이다. 피조물은 창조주의 권한에 불평할 수 없으며, 주어진 환경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삶의 목적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은 우리의 이웃에 대해 복음 전파와 그들을 사랑할 명령을 부여받는다. 창조주의 권한을 부인하는 사람은 어떤 경제적 지원과 사랑도 당연히 받아야 할 권리로 생각할 뿐이다. 복음 전파가 선행하거나 동행하지 않는 사회적 돌봄은 수혜자의 구원과 무관할 뿐 아니라 방종을 낳기 쉽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다(미 6:8). 예수 그리스도는 공의와 사랑의 실체이시며, 그분이 행하신바 즉, 사랑 가득한 공의가 균형 있게, 순서에 맞게 행해지는 것이 바로 성경적 정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