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9월 15일, 뉴욕을 중심으로 시작한 월드밀알선교합창단이 사역한 지 어느덧 20년이 됐다. 사람도 20살이 되면 성년이라고 축하파티를 갖는데, 선교합창단 20년 세월은 그보다 더 한 기쁨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밀알선교합창단과 함께 성장한 아이이 있으며, 합창단과 함께 신앙 성숙을 경험하는 이들이 있다. 또한 밀알선교합창단 뒤에서 이들 사역에 대해 눈물로 기도하는 권사가 있다. 20년이 아닌 40년 세월 동안…….

본지는 38살 젊은 시절에 밀알선교회를 만들어 77세가 된 지금까지 이들 사역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김영숙 권사를 만나 밀알선교합창단이 세워지기 이전 역사를 들어봤다. -편집자 주-

40년 전 기도모임으로 시작한 세계밀알선교회
밀알선교합창단 태동은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작은 기도모임으로 올라간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집회를 인도했던 윤영애 권사(현 월드밀알선교합창단 회장, 83세)는 특히 신유 은사로 몸과 마음이 아픈 자를 많이 치유했다. 이에 집회 이후 은혜를 받은 이들 모임이 자연스롭게 형성되며, 부산에서 정기적인 기도회 모임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부산 지역 경우 아파트를 기도 처소로 이용하던 중 사람의 입주로 밤새도록 기도를 하지 못했기에 밀락동이라는 곳에 '밀알기도원'을 세워, 그때부터 매일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전국 집회로 바빴지만, 1달에 한 번씩은 윤영애 권사가 집회를 인도하며 은혜 말씀을 전했다.

이후 기도팀은 부산 시내에 있는 밀락동보다 더 기도하기 좋은 장소를 알아보다가 거제도에 기도원을 마련하게 됐다. 당시 매주 부흥성회 강사로 전국을 다녔던 윤영애 권사는 자신 수고비를 장신대 신학생 등록금을 위해 모두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들 신학생은 거제도 기도원 봉헌예배를 드릴 때 참석하기도 했다. 그 당시 부산 모임을 밀알선교회 모임으로 가졌으며, 거제도 기도원에서는 평신도뿐 아니라 목회자도 많이 참석한 가운데 집회가 연이어 진행됐다. 윤 권사는 특히 신학생을 위해 기도하며 어학공부를 열심히 할 것을 당부했는데, 그들 대다수가 현재 미국에서 목회하고 있다.

매 집회마다 일어나는 병고침 기적
거제도 기도원에서는 일 년에 2번씩 여름방학과 겨울 방학 때 광주·목포·대구·서울 등 각 지역 지회 구성원이 모여 집회를 진행했다. 그럴 때면 특히 환자가 기도원을 많이 찾아왔다. 복수에 물이 가득차 죽음을 기다리며 희망 없이 사는 사람, 귀신들린 사람, 암으로 또 불치병으로 삶을 포기했던 이들이 집회를 통해 은혜를 받으며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났다. 평신도뿐 아니라 목회자도 참석해 집회마다 하나님 크신 역사가 일어났다. 이와 동시에 윤영애 권사는 각 교회를 돌아다니며 집회를 계속 진행했다.

밀알선교회 회원 직장에서도 기적 같은 일이 많이 일어났다. 부산대학병원 간호사로 서기관까지 맡았던 김영숙 권사(77세)는 "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환자가, 윤 권사님 기도로 회복되는 기적이 많았다"며 "부인은 간호사이며 남편은 의사였던 한 가정이 있었다. 그 가정에는 결핵성 기관지염과 만성 습진이 있던 1살 된 아들이 있었고, 부인은 12가지 질병이 있었으며, 자궁외 임신으로 누워 있었다. 부인은 세례교인이었지만 남편이 불교지도교수라 교회를 다니지 않고 있었는데, 상태가 더 안 좋아져 남편도 허락해 같이 교회에 갈 수 있게 됐었다. 그 부인은 권사님 기도를 받아 지금 얼마나 건강해졌는지 모른다. 또 아이도 철거민이 사는 지역의 제일 높은 곳에 개척된 교회에 1년 동안 엎고 가 기도드렸더니 다 나았다. 지금은 그 아이가 의사가 됐다고 한다. 또 그 부인과 남편도 집사가 돼 잘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이런 가정이 정말 많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한 "은혜를 받고 보니까 내가 직장 생활하고 교회를 섬겼던 것이 나를 위해 했지 주의 이름으로 남을 위해 사랑하고 그런 게 없었다"며 "윤 권사님은 우리가 한 알의 떨어진 밀알이 되려면 예수님처럼 다른 이를 섬겨야 밀알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이에 우리가 모여서 주의 이름으로 일을 하자는 생각으로 시작된 것이 밀알 선교회다"고 설명했다.

김 권사는 "지금도 윤 권사님은 죽을병에서 살아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하고 있다. 권사님이 기도 가운데 말씀을 주시면, 과연 그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기도해주시면 무조건 아멘하고 순종했었기에 모두 하나님이 축복을 받았던 것 같다."라며 " 권사님은 '한 알의 썩어진 밀알이 되야 한다. 썩어지지 못하면 열매를 못 맺는다. 우리는 죄 많은 인간이기에 회개로 시작해 회개로 끝나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뜻대로 순종하지 않으면 다 죄가 된다'고 강조하셨기에 항상 순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교회개척과 목회자 양성에 힘을 쏟은 세계밀알선교회
밀알선교회는 들어온 헌금을 개척교회를 위해 사용했다. 이에 부산지역에서 알락교회와 동강교회를 시작으로 여러 개 교회가 세워졌다. 또한 밀알선교회 회원은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주위 사람을 위해 봉사했다. 군대를 방문해 그들을 위해 기도를 하며, 추위를 이길 수 있도록 귀마개나 음식 등을 준비해 가 나눠주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윤영애 권사는 신학생 기르는데 힘썼다. 우국 기도원에 있을 당시 도망온 조직폭력배를 말씀으로 변화시켜 신학생으로 공부시켰으며, 집회를 다니며 개인적으로 받는 감사헌금은 물론이고, 과일 등 음식도 3명 아들 보다 신학생을 먼저 챙겼다. 또한 윤 권사는 서울 윤락여성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등 수 많은 목회자와 여 전도사, 사모를 길렀다. 이는 윤권사 어머니가 이북에서부터 많은 신학생을 키우는 것을 봤기에, 신학생을 위한 헌신이 더욱 자연스러웠을지도 모른다.

김 권사는 "윤 권사님은 자신과 자신 자녀를 위해 쓰는 게 없었다. 양말 한 컬레, 옷 한벌도 권사님 위해 안 썼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로지 주의 이름으로 사용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많은 주의 종을 기르고, 아픈자를 회복케 했지만 권사님은 '평생 내가 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신다"고 덧붙였다.

세계밀알선교회와 월드밀알선교합창단
윤영애 권사 집회로 은혜 받은 이들이 모이며 시작된 밀알선교회는 1987년 월드밀알선교합창단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졌다. 밀알선교회에서 활동했던 지금은 많이 흩어지고, 세월이 흘러 이미 유명을 달리한 이들도 있지만 여전히 매주 월요일마다 예배를 드리며 밀알선교합창단을 위해 기도하며 밀알선교회를 유지하고 있다. 윤 권사가 미국으로 들어오기 4년 전 까만 해도 한국에서 매주 모여 기도회를 진행했었다.

김영숙 권사는 "밀알선교회 설립 당시 세 분이 기도하던 이들이 있었는데, 나만 혼자 남았다"며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사용하시는 이도 하나님이다. 권사님을 닮아서 마지막까지 섬기고 나눔 삶을 살다가 하나님 앞에 부름 받고자 한다. 또한 기도로 밑거름이 되자는 생각으로 열심히 중보기도 하고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