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에서 메타버스에 교회를 세우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 언급했다. 메타버스 공간에서 목회하고 전도를 하려는 전략은 결코 시대를 앞서가는 세련된 전략이 아니다. 병법으로 말한다면 적이 유도한 사지(死地/죽을 땅)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같다. 세상 병법서를 보면 전쟁은 자신이 이길 수 있는 진 안으로 적을 끌어들여야 이긴다고 한다. 자기에게 불리한 진영에서 적들과 싸운다면 아무리 월등한 군사력과 병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길 가능성이 희박하다. 이순신 장군이 23번 전쟁을 해서 23번 다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용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는데 누구보다 눈이 밝았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은 적들이 만들어 놓은 불리한 진영 안으로 들어가는 무모한 전쟁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승리의 핵심이었다.
근원으로 돌아가라(ad fontes)
그러면 지금처럼 모든 것이 디지털화된 세상에서 우리가 영적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먼저 과거 역사를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 종교개혁자들이 로마 가톨릭이라는 거대한 제국 속에서 했던 믿음의 싸움은 우리가 현재 당면한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개혁자들은 'ad fontes', 즉 근원으로 돌아갔다. 근원으로 돌아갔더니 불가능해 보였던 상황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개혁자들이 근원으로 돌아간 방식이 무엇인가? 시대에서 성경을 실용적인 측면에서 본 것이 아니다(이것이 오늘날 교회들의 문제다). 반대로 실용성이나 합리성을 다 배제하고 '성경으로 시대를' 보았다. 그러자 가톨릭이라는 거대한 제국을 무너뜨릴 수 있는 길이 보였다. 그러면 현실에 적용해야 할 ad fontes는 무엇인가
무너진 가정을 성경적으로 회복하라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최초로 창조하신 조직은 '가정'이었다. 가정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신약의 교회와 방불한 하나님의 피조물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가정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인 삼위일체(三位一體)와 매우 흡사하다. 이런 사실은 창세기 2:24에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고 하신 말씀에 잘 나타난다. 가정은 남편과 아내가 이위일체(二位一體)로 존재하도록 창조됐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도록 하셨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 기독교 가정의 현실은 이 세대의 풍조를 따라가면서 이위일체를 상실한 지 오래됐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는가? 이위일체를 이루도록 하시는 주체이신 하나님을 가정의 주인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편과 아내의 이위일체는 둘이 서로 뜨겁게 사랑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우리(하나님)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돼야 한다(요 17:21). 오로지 하나님 안에 있어야 한다. 인간적인 로맨스나 심리적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가정의 하나 됨은 하나님의 형상과 무관하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이위일체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에는 결코 일체(한 몸)를 이루지 못한다. 작금의 위기를 돌파하려면 교회는 오직 말씀과 기도 안에서 일체를 이루는 가정을 세우는 일에 온 힘을 쏟아야 한다.
교회가 아닌 부모로부터 신앙을 전수하라
이렇게 부부가 하나님 안에서 서로 한 몸을 이루는 가정 속에서 주일학교 교육은 비로소 실효를 거둘 수 있다. 주일학교 교육의 궁극적 목적은 구원받은 아이들을 만드는 것이기보다, 경건한 자손을 얻는 데 있다(말 2:15). 아이들의 구원은 바로 여기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경건한 자손을 만드는 책임은 교회보다 가정(부부)에게 더 무게 추가 기울어져 있다. 교회 교육은 부모의 자녀 교육을 지원하는 보조적인 역할로 한 걸음 물러나야 한다. 메타버스 시대에서 자녀 교육의 중심은 힘들고 어렵더라도 교회가 아닌 부모의 책임으로 기울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메타버스 시대의 교회 아이들의 영혼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학살 수준으로 세상에 빼앗길 것이다. 이런 사실은 과거 코람데오닷컴에 실린 통계하나만 쉽게 알 수 있다. 이 통계에 의하면 자녀 신앙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사람이 목회자가 아니라 부모라고 한다. 설문 내용은 "신앙적인 가정을 위해 가장 중요한 역할자"가 누군가였다. 여기서 아버지가 51%, 어머니는 40%인 것이 비해 목회자는 2%에 불과하다.1)
충격적이지만 이런 통계는 성경의 가르침과 크게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자녀 신앙은 부모의 책임으로 가르치기 때문이다. 가정이 이 책임을 등한시했기 때문에 교회는 수많은 젊은이들을 세상에 빼앗기는 참사를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애석하게도 상당수 교인들은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신앙교육을 교회 책임으로만 이해하며 더 좋은 교회학교를 운영하는 교회를 찾는다. 그러나 부모의 신앙과 삶이 개혁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자녀들의 신앙이 드라마틱하게 달라지기 어렵다. 다시 강조하지만, 가정은 경건한 자손을 세우기 위해 주신 제도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소위 '쉐마'로 알고 있는 신명기 6:4-9은 이런 사실을 아주 잘 말해준다.
쉐마교육의 핵심은 부모가 삶으로 본을 보이는 것
신명기 6:4-9의 쉐마를 간단하게 정리한다면, 부모부터 마음에 할례를 받고 그다음에 자녀의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교육의 한계는 마음에 할례받지 않은 부모에 의해 교회 교육이 무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교회에서 교역자와 교사가 아무리 잘 가르쳐도 부모가 불경건한 삶과 말을 하면 한순간 물거품이 되고 만다. 이것이 현장에서 교육하는 목회자와 교사의 목소리다. 부모는 자녀가 마음의 할례 받기를 바란다면 자기 마음부터 할례를 받아야 한다. 신명기 말씀은 이 사실을 아주 명확하게 가르친다. 신명기 말씀은 부모부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고 명령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부모를 향해 "이 말씀을 부모 마음에 새기"(6절)라 한다. 말씀을 자녀 마음에 새기기 전에 부모 마음부터 새겨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마음의 할례다. 이렇게 부모 마음에 할례가 행해지면, 비로소 자녀들로 하여금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7절)을 명령하신다. 부모가 먼저 말씀을 통해 마음의 할례를 받고 그다음에 비로소 자녀의 마음에 할례를 행할 수 있다는 논리다. 이것이 메타버스 시대에 교회가 돌아가야 할 근원이다.
이런 차원에서 가정은 메타버스보다 더 강력한 자녀 신앙교육의 멀티미디어다. 이런 사실을 신명기 6:8-9이 아주 명확하게 가르친다. 먼저 8절은 부모가 말씀을 손목에 매어 기호로 삼으라 한다. 이는 '행동으로 본을 보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부모의 미간에 붙여 표로 삼으라고 한다. 이는 지성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도록 '가르치라'는 것이다. 이런 명령 후에 마지막으로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고 명령한다. 이 명령의 핵심은 가정 전체가 멀티미디어 센터가 되도록 하라는 말이다.
믿음으로 싸우면 이긴다
좁은 지면에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여기서 글을 정리해야겠다. 결론을 맺으면서 우리 기독교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것은 유대교나 이슬람과 같은 종교들은 신앙 전수의 장소를 가정으로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슬람은 아기가 태어나면 그 아기의 귀에 "알라는 위대하다"라는 말을 가장 먼저 들려준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해서 가정은 꾸란을 가르치고 암송하도록 만드는 교육기관 역할을 한다. 유대교는 두말할 나위도 없다. 유대인들은 무슬림들처럼 아이를 많이 낳기로 유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근하면 집에 와서 때로는 10명 정도 되는 아이들에게 신앙교육을 시킨다. 물론 어머니도 온종일 아이들에게 시달리며 육아와 신앙교육을 병행한다. 유대인들에게 가정은 신앙교육의 중심지다. 무슬림이나 유대인들은 가정과 직장이 신앙을 자녀에게 전수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이들에 비해 너무 안일하고 느슨하다. 가정의 존재 목적을 성경적으로 이해하는 부모가 많지 않다. 무엇보다 경건한 자손을 얻도록 주신 기관이라는 인식이 너무 희박하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메타버스 시대를 이겨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그러나 늦지 않았다. 이제부터라도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것처럼 ad fontes, 즉 근원으로 돌아가면 살길이 열린다. 믿음으로 순종하면 반드시 세상을 이길 수 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고 하셨다. 뿐만 아니다. 사도 요한은 믿음은 세상을 이긴다고 했다(요일 5:4). 더 나아가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 장이라 불리는 11장에서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히 11:38)고 했다. 세상이 아무리 거대한 힘으로 공격할지라도 근원으로 돌아가 믿음으로 싸운다면 반드시 이긴다. 이 믿음을 가지고 이제 근원으로 돌아가자.
김민호 목사(회복의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