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 중층적 정체성 표현 위해 장르 뒤섞기 시도
성경, 확고하고 일관된 정체성과 세계관 정립 중요시
포스트모던 문화, 성경 가르침 인간 본성 위배 판단해
삶 이루는 시공간은 오직 하나, 다른 가능성 불가능해
◈장르의 불협화음: 슈퍼히어로와 호러 장르 결합으로 표현된 정체성 혼란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의 서사는 주술사 스트레인지와 스칼렛 위치 완다의 정체성 혼란이라는 소재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샘 레이미 감독은 이 정체성 혼란을 표현하기 위해 다중우주의 다른 자아들을 등장시키는 동시에, 두 개의 영화 장르를 뒤섞어 놓는다.
샘 레이미는 2000년대 초 소니 픽쳐스의 <스파이더맨> 트릴로지 감독으로 명성을 얻기 전, 1980-90년대 <이블 데드>나 <다크맨>같은 B급 호러, 스릴러 영화 감독으로 잘 알려져 있던 인물이다. 그는 이번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에서 자신의 장기인 호러, 스릴러 장르 연출방식을 사용해 서사의 긴박감을 높였다.
이처럼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장르들을 뒤섞어 놓는 것, 장르 간 불협화음을 이용해 오묘한 조화를 느끼게 해주는 방식은 포스트모던 예술의 전형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포스트모던 예술은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 표현 양식 또한 인간 인격과 세계의 혼란스러우면서도 중층적인 본질을 나타내는 데 특화되어 있다.
이렇게 다원적 요소들의 충돌을 통한 혼돈과 조화라는 주제의식을 반영하는 문화예술 양식은 오늘날 대중문화 조류의 대세를 이루고 있다.
최근의 대중은 고전예술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캐릭터도, 서사도, 그리고 전달하려는 메시지도 확고한 일관성을 보이는 고전예술이 단조롭고 지루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전예술은 삶의 현실을 중시하는 까닭에 상상력을 절제하면서 활용하기 때문에 무한한 상상력 활용을 장려하는 오늘날 세태에 익숙해진 이들에게는 갑갑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이런 이유로 이전에는 일부 매니아들만 심취하던 판타지, 오컬트, 슈퍼히어로, SF 영화나 드라마가 현재 대중문화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장르로 자리잡고 있다.
또한 역사적 사건이나 실화를 기반으로 하는 작품들도 기록된 실제 사실에 의존하기보다는 작가나 감독의 상상력을 통해 완벽하게 재구성된 서사를 선보이는 데 치중한다.
일례로 1980년대 한국에서 제작된 사극 드라마, 영화와 2000년대 이후의 사극은 완전히 다른 연출 방식을 선보인다. 이전의 사극이 논픽션에 픽션 요소를 부분적으로 채택했다면, 현재의 사극은 픽션이 주를 이루는 서사에 일부 논픽션 요소를 일부 가미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나마 고전예술 가운데 오늘날까지 크게 각광받는 분야가 있다면 신화와 전설이다. 초월적 세계 혹은 이면 세계에 대한 초현실적이고 몽환적인 상상력을 선보이는 신화와 전설은 표현방식 및 주제의식 측면에서 포스트모던 예술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최근 대중문화 콘텐츠에 확연하게 드러나는 이런 포스트모던 문화조류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에 상당한 부담감을 안겨준다.
성경은 신앙인으로서 확고하고 일관된 정체성과 세계관을 정립하는 일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가르치는데, 포스트모던 문화 조류의 관점으로는 이러한 가르침이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과 삶의 정황에 위배되는 것으로 판정되기 때문이다.
▲호러와 슬래셔 장르가 결합된 슈퍼히어로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
◈가능성의 불협화음: 신앙과 불신앙이 뒤섞인 중층적 인격의 위험성
신구약 성경을 막론하고 성경에서 권유하는 인간상은 초지일관 하나님의 계명을 충성되게 지키는 인간이다.
중층적이고 다원적인 인격 형성을 당연시하는 오늘날 문화 조류는 성경에서 바람직한 것으로 평가되는 충성되고 신실한 인간상에 위배된다. 성경 안에서 중층적 인격을 가진 인간이란 신앙과 불신앙이 뒤섞여, 결국 하나님의 뜻을 순전하게 따르기를 포기하는 이들이다.
대표적인 예로 구약에는 여로보암, 신약에는 마술사 시몬 같은 이들이 있다. 여로보암은 선지자 아히야를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북왕국 이스라엘의 초대 국왕으로 옹립되었지만, 정치적 계산에 따라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산당을 세웠다.
자신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을 자기 식대로 섬기려는 생각으로 신앙과 우상숭배를 절묘하게 뒤섞은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북왕국 이스라엘의 고질적인 우상숭배 전통을 세운 악한 왕으로 생애를 끝마치게 된다(왕상 11-14장).
신약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다른 종교적 가르침을 뒤섞은 인물이 등장하는데, 바로 마술사 시몬(행 8:9-24)이다. 그는 하나님의 성령을 받는 은혜를 마술의 능력처럼 취급해 사도 베드로에게 엄한 경고를 받았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과 이교적 주술을 뒤섞어 추구했던 마술사 시몬은 성경에서 본받지 말아야 할 인물로 소개됐을 뿐 아니라, 훗날 기독교 교부 유스티누스와 이레니우스의 저서에서 기독교 계통 영지주의 이단의 창시자로 지목된다.
이처럼 성경은 신앙인이 인격의 다원성 혹은 종교적 다원성을 추구할 때 뒤따르는 위험성을 누차 경고한다. 성경에서 신실하고 본받아야 할 이들로 소개되는 신앙인들, 대표적으로 사도들을 보면 그 인격과 심성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들어 일관되고 순전하다.
그런데 이런 심성은 오늘날의 문화조류 입장에서 볼 때는 부자연스럽다. 다양한 사상과 전통을 접하면서 살아가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삶의 정황을 부정하는 사고방식으로 비치는 것이다.
▲다중우주를 넘나들며 자기 삶의 가능성에 대해 많은 것을 깨달은 시니스터 스트레인지. 이마의 송과선 자리에 생겨난 제3의 눈은 인격과 세계의 중층적 다원성에 대한 깨달음을 표시한다. |
오늘날 대중문화에 적용된 포스트모던 문화 조류는 삶에 배태된 다양한 가능성을 존중한다. 이는 에버렛이 제안한 다세계 해석의 근본사상이기도 하다.
다양한 삶의 가능성들이 모두 현실성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어느 하나도 현재를 살아가는 자신의 인격에서 완전하게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 다세계 해석에 기댄 인간 이해이다.
단적으로 말해, 다세계 해석 안에서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같이 힘써 신앙을 지켜나가는 내가 존재하는 세계도 있고, 신앙 없이 살아가는 내가 존재하는 세계도 있다. 그리고 이 두 세계는 양자 얽힘의 원리를 따라 연결되어 있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신앙인 속에 신앙과 불신앙이 공존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반면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순전하게 받드는 신앙의 삶에 위배되는 모든 가능성들이 현실화되지 못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라고 가르친다.
성경의 세계관과 인간 이해에 따르면 삶을 이루는 시공간은 오직 하나일 뿐이며, 하나의 가능성을 선택하면 다른 가능성은 포기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성경은 반드시 신앙으로 무장된 삶의 가능성을 선택하고 불신앙으로 기우는 삶의 가능성을 무력화할 것을 촉구한다.
결론적으로,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를 비롯한 최근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작품들은 다중우주 이론과 다원적 인격을 수긍하는 인간이해를 기반으로 서사를 전개해 나가고 있다.
그 서사 자체는 성경이 가르치는 기독교 신앙과 별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근저에서 서사를 뒷받침하는 세계관과 인간 이해, 그리고 서사의 전개 방식이 성경에서 권장하는 인간 이해 및 세계관과 상충된다. 이것이 기독교적 관점에서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를 높게 평가하기 어려운 이유이다.
▲성경의 가르침과 상충되는 인간이해와 세계관을 추구하는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