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은 장애인의 날이 있는 달입니다.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 등으로 장애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가운데,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는 홍성수 목사의 주장을 들어봅니다. -편집자 주

장애감수성은 쉽게 이야기하면 '장애'나 '장애가 있는 사람'에 대한 반응입니다. 장애에 대해 이해하고 존중하자는 마음 태도입니다.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와 교회에서는 '장애'나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교회에 오면 불편하거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거나 당황하기도 합니다.

교회의 가장 큰 장점은 '사랑'인데, 사랑이 많더라도 사랑해야 할 대상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사랑하고 싶어도 제대로 된 사랑을 할 수 없겠죠. 그러나 교회 안에 '장애감수성' 즉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마음'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진정한 사랑을 서로 베풀 수 있습니다.

사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정말 많은 '장애감수성'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치유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 사역 중 예수님의 탄생과 십자가, 부활 그리고 말씀 사역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사역 현장에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만나 치유하고 복음을 전한 사건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4:23-24, 8:1-4, 8:5-13, 8:14-15, 8:16, 8:28-34, 9:2-7, 20-22, 18-25, 27-29, 32-33, 10:1, 12:10-13, 12:22, 14:34-36, 15:21-28, 15:29-31, 17:14-21, 20:29-34, 21:14; 마가복음 1:23-28, 40-45, 30-31, 32-34, 2:1-12, 3:1-5, 11-12, 5:1-15, 1-20, 22-42, 25-29, 6:7-13, 53-56, 7:24-30, 31-35, 8:22-26, 9:14-29, 10:46-52; 누가복음 4:33-37, 38-39, 40-41, 5:12-16, 17-26, 6:6-10, :17-19, 7:1-10, 11-15, 8:26-39, 43-48, 41-55, 9:1-6, 11, 37-43, 11:14, 13:10-13, 14:1-4, 17:11-14, 18:35-43, 19:1-10, 22:50-51; 요한복음 4:46-53, 5:1-9, 9:1-7, 11:1-44.)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거의 대부분 한 장에 1장 꼴로 예수님이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만난 장면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장애감수성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자주 만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9장 27-31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두 사람의 시각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만나 치유하시기 전에 그들과 대화를 하십니다.

그들이 다가와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오지 마라" 하거나 "귀찮은 듯 내색을 하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그들을 그들의 마음을 확인하시고(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그들을 눈을 손수 만지시며 고쳐 주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장면들,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대하는 모습들 속에서 예수님의 장애감수성이 얼마나 공감과 존중의 마음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마 9:20-22, 마 15:21-28, 20:29-34, 막 2;1-12, 3:1-5, 7:31-35, 8:22~26, 9:14~29, 눅 7:1-10, 13:10-13, 17:11-14, 19:1-10, 요 5:1-9, 9:1-7).

전장연 장애인 시위
▲전장연의 지난 3월 충무로역 퇴근길 시위 모습. 

그리고 또 하나 예수님의 장애감수성은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게 하고, 비전을 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 1-3절을 보면, 사람들과 제자들은 날 때부터 시각장애가 된 사람들을 보고 그 사람이 시각장애가 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인지 질문합니다. 즉 시각장애가 죄의 결과로 발생된 것임을 이해하고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의 문제가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죄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3절)"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사람들은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어떤 죄 때문에 장애가 된 것으로 이해하고 그들을 무시하며 죄인취급을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죄인 취급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쓰임받는 존재로 이해하고 그들을 치유하고 그들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들은 그저 무시해야 할 죄인이나 장애로 인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쓰임받는 하나님의 자녀"요, 또한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도 함께 동역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장애감수성은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을 넘어, 동등한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동참할 수 있는 관계로 인정한 것입니다.

보통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애인들이 무의식적으로 아무것도 못하고 할 수 없는 존재라고 인식합니다. 그러다보니 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장애만 보고 판단하고 함께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장애'를 보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들이 정말 어떤 존재인지 그 본질인 정체성을 알고, 그들도 동등하게 구원받아야 할 죄인인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쓰임받는 존재라는 것을 밝혀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 교회공동체의 장애감수성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우리 교회공동체의 장애감수성은 몇 점 정도 될까요? 우선 아래 질문에 점수를 체크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장애감수성

위의 장애감수성 질문에서 15점 이상이면(평균 3점 이상) 어느 정도 장애감수성이 있다고 볼 수 있지만, 만일 그 이하이면 교회에 사랑이 많다 해도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사랑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그 진실한 사랑을 장애가 있는 사람들도 장애감수성으로 이해하고 함께한다면 예수님의 사역처럼 더 큰 사랑을 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우선 장애감수성은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반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그냥 만났던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만나셨다면, 우리도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만나고 교회공동체에 적용했을 때 예수님처럼 충분히 교회 안에서도 장애 성도들에 대한 장애감수성을 가지고 사역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만날 때 그 사람이 어떤 존재냐에 따라 대우가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사장님이나 대표를 만난다면 그에 따른 대우를 할 것이고, 만일 우리보다 좀 낮은 사람들을 만나면 좀 더 편하게 만나고 그에 맞게 대처할 것입니다.

장애가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만난다면 그 아는 만큼 대우를 할 것입니다.

4가지 주제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첫 만남, 장애,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또 다른 가능성입니다.

장애감수성

여러분은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 대해 어떤 느낌인가요? 불편하거나 어색하진 않으신가요? 그래서 그들을 만난다는 것이 좀 꺼려지지는 않나요? 그 이유가 단지 그들의 '장애'라는 이유 때문일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요?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 대해 우리가 처음부터 잘 아는 것은 아닙니다. 만나면 어떻게 할지 몰라서일 수도 있고, 어색하고 낯설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요?

우리도 보통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나 그 상황에 있으면 처음에는 어색하고 낯설어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할 때가 있습니다. 회사에 처음 입사할 때나, 신입생 때나, 교회 새신자반에서 더 그렇죠. 그러나 하루 이틀 자주 만나면 어떤가요. 시간이 갈수록 더 알아가고 친해지고 친구가 되기도 합니다. 처음이라서 그렇지 자주 만나면 괜찮다는 것이죠.

장애가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장애' 때문이 아니라 처음 만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렇지, 자주 만나면 어떨까요? 그들도 서로 알아가고, 무엇이 필요한지 알게 되면서 점점 친해지겠죠. 장애가 있는 사람도 처음 만나서 그렇지, 자주 만나면 괜찮다는 것이죠. 이렇게 보면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불편하지 않을 것입니다.

장애감수성

두 번째로 '장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모든 사람에게 '장애'가 있습니다. 안경을 쓴 것도 눈이 잘 안보이는 '장애 요소'나 불편함이 있어 안경을 쓰는 것이고, 공부를 못하거나 운동을 못하는 것도 잘 외워지지 않거나 잊어버리는 어떤 '장애 요소'가 있기 때문이죠.

그러고 보면 누구나 '장애'나 불편함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애'에 대한 개념을 넓게 이해한다면, 누구에게나 장애 요소가 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해서 '장애인'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휠체어를 이용하거나 어디가 손상됐거나 눈에 보이게 좀 심한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 저는 '장애인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요. "장애가 있을 뿐이다."

장애가 있을 뿐, 장애인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요즘 사회에서는 아직도 '장애인' 하면 장애 하나만 있어도 '모든 것을 못하는', '~을 할 수 없는' 존재로 이해합니다.

장애감수성

그래서 사회에서는 보통 장애인 하면 무의식적으로 아무것도 못하는 존재로 낙인찍는 경우가 많죠. 그러나 장애가 있을 뿐, 그 장애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에서도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많이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장애가 있는 성도들이 교회에 오면(특히 중증)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서 그저 예배 드리고 가는 것만으로 만족해 합니다. 성도로서의 대접(?)이 아니라, 그저 장애인으로서 대접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그러다 보니 장애가 있는 성도들은 교회에서 성도라기보다 그저 장애인 취급을 당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교회공동체에서는 장애인이 아닌 성도로서 함께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장애감수성

세 번째로 위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장애가 있을 뿐 장애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없고 할 수 있는지 구분해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손에 장애가 있어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세요. 무엇을 할 수 없을까요? 식사도 못할 수 있고, 필기하는 것도 불편하고, 물건 드는 것도 쉽지 않겠죠.

그럼에도 손에 장애가 있어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공부도 할 수 있고, 노래도 잘 할 수 있고, 달리기도 할 수 있고, 이야기나 강의도 할 수 있겠죠. 그러고 보면 손에 장애가 있어서 할 수 없는 것보다 할 수 있는 것이 더 많겠죠. 또 잘 못하는 것도 도구나 봉사자들의 도움을 통해서도 충분히 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해 보니, 장애가 있어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장애감수성

마지막 네 번째로 또 다른 가능성(능력)입니다. 좀 전에 장애가 있어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들의 또 다른 가능성입니다. 손에 장애가 있어 할 수 없는 것은 분명히 있지만, 그렇다 해서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을 못하진 않습니다.

손에 장애가 있어도 그들은 뇌나 입 또는 다른 감각 등으로 공부도, 노래도, 영화도 다른 수많은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이 또 다른 가능성(능력)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장애'만 보고 판단합니다. 그런 장애가 있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낙인찍어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당연히 그들의 장애만 보면 할 수 없습니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장애가 아닌 그들의 존재, 그들이 하고 싶어하는 다른 것, 꿈, 좋아하는 것, 잘 하는 것 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또 다른 가능성을 우리가 봐야 합니다. 그들이 장애가 있어도 그들의 꿈과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을 우리가 보고 지원한다면 그들도 꿈고 희망을 가지고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장애감수성

교회 공동체에서 이 장애감수성은 정말 필요합니다. 많은 교회들이 교회공동체 안에 장애 성도들이 10% 이상 출석하지 않고 장애인들이 없는 이유는 바로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장애만 보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사랑을 바로 알고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자기 자신이 죄인인 것과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자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는 그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을 주는 사랑입니다. 그 모든 사람 안에는 장애가 있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장애가 있으니 도움만 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장애가 있어도 하나님의 자녀요 함께 교회 공동체에서 예배하며 신앙생활하는 교회 성도로 받아들이고 같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쓰임받는 존재로 존중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장애감수성

즉 교회는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아무것도 못하는 장애인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장애가 있어도 하나님의 자녀요 함께 예배드리고 신앙생활해야 하는 존재로 알고 함께 해야, 예수님께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만나 치유하고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쓰임받을 수 있도록 한 것처럼 교회공동체에서도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진정한 장애감수성으로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장애감수성은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쓰임받는 존재로 알고 그들을 만나 치유하고 복음을 전하고, 나아가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드러나게 하셨으며, 그로 인해 치유사역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게 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 교회 공동체도 예수님의 장애감수성을 알고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쓰임받는 존재임을 알고 장애가 있어도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존재, 장애가 있어도 함께 예배하며 신앙생활하는 교회공동체 성도로서(장애인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감수성으로 사역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언급하자면, 교회 주변에 믿지 않는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10% 이상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들을 봉사나 후원 대상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그들도 구원받아야 할 영혼이며 교회공동체에서 함께 예배드려야 할 대상으로 알고 전도와 선교에 함께 동참할 수 있도록 기도하며 준비하는 교회 되기를 바랍니다.

홍성수
▲홍성수 목사(한국밀알연합회, 밀알장애인선교연구소 소장).

홍성수 목사
천안밀알선교단 단장
밀알장애인선교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