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는 능력이다. 속도는 부와 권력과 힘을 제공한다. 속도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 대한민국의 인터넷 속도는 1999년 디지털 가입자 회선 (ALDSL)이 상용화된 이후 2018년 10기가 인터넷 서비스가 상용화되기까지, 20년간 약 1,200배 이상 속도가 빨라졌다.
1999년 4월 ADSL 기술로 구축된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가 상용화되었을 때, 속도는 8MBPS였다. 당시에는 전화선을 이용한 인터넷 서비스였다.
그 이후 20Mbps급 상용화 서비스에 성공하고 2007년 100Mbps 급을 성공하면서, IPTV 등 혁신적인 서비스 등장 기반을 조성하는데 성공했다. 인터넷 속도는 가공할 만큼의 속도 경쟁을 통해 약 7년 후인 2014년 최고속도 1Gbps에 성공하여 기가 인터넷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리게 되었다. 그 후 4년만에 10Gbps에 성공해 앞으로 25Gbps, 50Gbps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다.
한국의 인터넷 속도 수준은 광대역 부문에서 세계 1위, 모바일 부문에서는 상위권에 올라 있으며, 이동통신망을 비롯한 인터넷 IT 관련 인프라는 세계 최상을 자랑한다.
지난 9월 28일 북한은 새로운 탄도 미사일을 발사했다. 지금까지 북한이 미사일 발사로 도발해 오던 전례가 있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이번 발사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이번 탄도 미사일은 예전 미사일과 달리, 극초음속 미사일 실험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극초음속 미사일 비행 속도는 마하 5(시속 6120km) 이상을 의미 한다.
미국과 러시아, 중국이 보유하고 있는 탄도 미사일은 대부분 극초음속 미사일이다. 특히 중장거리 탄도 미사일 핵탄두는 대기권을 진입하는 순간 마하 15 이상의 속도로 비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탄도 미사일이 초음속 비행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빠르게 비행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극초음속 비행시 발생하는 마찰열이 섭씨 3,000도 이상이 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열에도 견디는 복합 소재 능력이 있어야 한다.
또 엄청난 가속력을 낼 수 있는 연료 역시 대단히 중요하다. 연료를 최적화하여 로켓이 추진력을 지속하도록 하는 기술은 아직도 세계 군사 선진국만이 보유하고 있는 국가적 기밀 중 기밀이다.
결국 초음속 비행체를 만드는 것은 권력이며 능력이다. 지금 미국과 러시아, 중국은 초초음속 탄도 미사일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초초음속 비행체 개발을 통해 얻어지는 경제적 효과가 다른 산업 발전에 미치는 영향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자동차가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자동차를 외면했다. 마차보다 속도가 느리다는 이유였다. 1807년 8월 17일 Robert Fulton의 최초의 미국 증기선인 Clermont가 뉴욕시를 떠나 Albany로 이동하여 세계 최초의 상업용 증기선 서비스를 제공하였다.
이 배는 평균 시속 5마일의 속도였다. 무려 150마일을 가는데 32시간이 넘게 걸리는 증기선이었다. 사람들이 증기선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증기선과 자동차의 속도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빠른 속도로 진화하게 된다. 시속 10마일을 넘지 못했던 증기기관차도 발전에 발전을 더해, 지금의 초고속 기차가 등장하여 마차보다 느린 고철 덩어리라는 오명에서 벗어난지 이미 오래 전 이야기가 되었다.
1825년 개통된 G. 스티븐슨 코로모선 기관차가 20km/h의 속도로 시작 하여 이후 1893년 시속 160km/h 의 속도로 발전하게 된다. 현재 열차의 속도는 통상 200km/h를 기준으로 초고속 열차와 보통 속도의 열차로 구분된다.
한국 KTX는 운행 속도 305km/h 로 세계 2위 수준을 자랑한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기차로 알려진 TGV는 세계 최고 기록으로 575km/h의 속도를 돌파하여, 시속 600km/h까지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한국도 400km/h 의 속도에 성공하여 곧 상업화될 수 있는 속도의 최정상 국가에 속해 있다.
2003년 에어프랑스와 영국항공이 퇴출시켜 사실상 항공 시장에서 사라졌던 콩코드 여객기를 미국 유나이트드 항공이 15대 구입하면서, 2029년 초음속 항공기 시대를 열겠다고 공언했다.
고도 6만 피트에서 시속 1,060km 이상으로 비행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초고속 항공 여행은 마하 2에 근접한 속도를 예상하고 있다. 이런 속도라면 지금 7시간 가량 걸리던 런던과 뉴욕과의 비행 시간을 3시간 30분대로 단축할 수 있다.
엄청난 속도로 비행할 때 생기는 소닉붐 현상과 함께 대단히 많은 연료가 필요한 문제, 특히 대기에 영향을 미쳐 민간인을 수송하는데 부적절 하다고 퇴출됐던 초음속 비행기가 새롭게 등장하는 데는 속도가 주는 능력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속도 전쟁은 한국인의 기질(빨리 빨리)과 묘하게 합을 이루면서, 현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속도전에 동참하도록 부추기고 있다. 아마존의 프라임 서비스를 통한 하루 배송 서비스, 예전 한국의 총알 택시 경쟁에서부터 한국 택배회사들의 전쟁, 야식 배달 서비스 전쟁, 로켓 배송도 느리다며 15분 배달을 목표로 내건 쿠팡의 퀵 커머스는 선택이 아닌 생존을 위한 필수가 되었다.
당일 배송이 아닌 서비스 반경 내 15분 배송을 서비스에 추가한 쿠팡의 상품이 등장했다. 인터넷 서점인 인터파크도 하루 배송을 선언했다. 이제는 하루에 배송을 받을 수 있는 시대가 왔다. 속도는 서비스 차원을 넘어서 생존이 되었고, 권력이 되었고, 부를 창출하는 능력이 되었다.
속도가 생존인 시대에 속도를 내려놓고, "조금도 바쁨도 없이 사는 삶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바쁘게 살지 않겠다는 분명한 의도를 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존 마크 코머(John Mark Comer)의 <슬로우 영성(출판사 두란노, The Ruthless Elimination of Hurry)>이란 책을 통해, 속도가 일상이 된 삶에서 속도를 내려놓고 우리 영적 삶을 돌아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을 '속도감 있는 삶에 중독된 사람들'이라고 정의 한다.
"잘 지내시죠?"라고 질문하면, 대다수 현대인들은 "네 바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고 말한다. '바쁘게 지내는 것이 잘 지내고 있는 것'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었다. 바쁘게, 속도감 있게 지내지 못하면 마치 잘 못지내고 있는 것 같은 불안감이 현대인들을 지배한지 오래 되었다. 그러나 단순히 바쁘게, 속도감 있게 살아간다는 것이 꼭 잘 살고 있는 것이란 보장은 없다.
한병철 교수는 <피로사회>에서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32쪽)"고 지적했다. 속도 경쟁에 중독된 우리의 일상이지만, 속도감만 높인다고 모든 것이 효율적일 수는 없다는 것을 인식 해야 한다.
우린 바쁘다. 대학생들도 교회 갈 시간이 없을 만큼 바쁘다. 아르바이트도 해야 하고, 스펙도 쌓아야 하고, 영어 시험 성적도 올려야 하고, 공모전에 출품도 해야 하고,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선행적인 업무도 익혀야 한다.
젊은 부모들도 바쁘다. 아이들도 돌봐야 하고, 주택 마련을 위해 하나 이상의 부업과 직업을 가져야 한다. (N잡러가 되어야 한다). 주식시장 동태도 살펴야 하고, 비트코인 시세도 시시때때로 챙겨야 하고, 새로운 공모주 청약도 들여다봐야 한다.
한 마디로 핸드폰을 손에서 내려놓고 살수가 없다. 때때로 좋은 부동산이 나왔다 하면, 발품을 팔아서 현장 조사와 답사까지 해야 한다. 정말 바쁘다.
목사들도 바쁘기는 마찬가지다. 정말 바쁘다. 새벽예배 설교준비, 금요예배, 주일예배, 설교 준비만 적어도 1주일 6번을 해야 한다. 설교 준비만으로도 너무 바쁘다.
거기에 일대일 심방과 교회 행사, 이제 교단 일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이후 온라인 예배와 영상 준비까지 속도를 내지 않으면, 한 주간 사역을 다 준비하기도 벅차다.
교회 성장도 빨리빨리 해야 한다. 3년 안에 목표한 성도의 숫자와 교회 건축을 해야 하고, 교회 재정도 확보 해야 한다. 교회 성장이 느리면 목사로써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없는 것이라고 목사들 스스로도 생각한다.
이렇게 속도감 있게 살았으니, "잘 지내시죠?"라고 물으면 "네 바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는 말이 자연스럽다. 이런 삶이 현대인들에게 있어 속도감에 중독된 삶이라 할 수 있다.
속도라는 것이 무조건 배척하고 나쁜 것은 아니어서, 건강한 속도와 바쁨은 때때로 필요하다. 예수님께서도 사역의 현장 속에서 식사할 겨를 조차 없으셨다.
예수님을 찾아오는 병자들과 상담자들 때문에 예수님은 저녁 늦게까지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시고, 안수하셔야 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처럼 바쁘게 지내라는 말씀이 없다.
존 마크 코머는 <슬로우 영성>에서 예수님의 속도에 맞추는 것이 필요 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천천히' 걸으신다. 하나님이 사랑이 아니시라면 훨씬 빨리 가실 것이다. 사랑에는 나름 속도가 있다. 그것은 내적 속도다. 그것은 영적 속도다. 그것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첨단 기술의 속도와는 다른 종류의 속도다. 이속도는 '느리지만' 사랑의 속도이기에 다른 모든 속도를 추월한다(40쪽)."
어쩌면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문화에서는 느리다고 하는 것이 경멸과 멸시의 표현으로 쓰이고 있다. 행동이 느리다, 말이 느리다, 두뇌 회전이 느리다, 서비스가 느리다, 드라마와 영화의 이야기 전개 속도가 느리다, 일처리가 느리다..., 심지어 사전에서도 '게으르다'와 동의어로 쓰이고 있다. 정말 느린 것은 나쁜 기만 한 것일까?
느려도 행복한 달팽이, 나무늘보, 거북이처럼 바쁨을 멈추고 속도를 늦추고, 하나님의 속도에 우리의 삶의 속도를 맞춘다면 세상의 모든 속도보다 빠름이 아닐까?
박종순 목사
제자들 교회
<열혈독서>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