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에 롱아일랜드 성결교회 임직식을 참석했다가, 27년째 인도에서 사역을 펼치고 있는 김영자 선교사를 만났다. 1980년, 한국에서 인도선교가 많지 않았을 시절에 다니던 직장(그는 문화방송 아나운서였다고 한다)을 그만두고 홀로(지금까지) 인도에서 Trinity Matic School 설립해 운영하며 아이들 사역을 열심히 진행하고 있다.

6년 만에 뉴욕을 들렸다는 그와 인도 선교사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는 불쑥 "선교사는 결혼식 청첩장과도 같다"고 말했다. 선교사가 왔다고 연락하면 '얼마만큼 선교헌금을 해야 하나' 걱정을 하고, 또 연락하지 않고 선교지로 가면 '왜 내게는 전화를 하지 않았냐'며 서운해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공감이 갔다. 나도 '언론 선교사'이기 때문이다. 7년 전 2000년 7월 7일에 한국에서 신문이 생겼을 때, 교계 많은 이들은 이렇게 빨리 신문사가 비약하리라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젊은 사람 몇 명이 '인터넷을 통한 언론선교'에 뜻을 같이 하며 시작됐던 신문(포털사이트 크로스맵도 함께 시작했다)에게 향한 시각은, 이미 수많은 교계 신문이 자리 잡고 있었기에 '얼마나 가는가 보자'는 것이었다. 게다가 인터넷을 중심으로 사역 하겠다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지금에야 많은 교회가 홈페이지를 만들어 관리하고 있으며 수개의 인터넷 기독언론들이 생겨났지만, 당시는 갓피플도 없었던 때다. 인터넷이 하나님의 도구로 제대로 쓰인다면, 복음에 미치는 영향력은 강력하다. 젊은 사람들이었기에 더 빨리 이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고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인터넷 선교 분야를 개척해야 했던 우리들은 후원을 부탁하며, 많이 거절당했다. 이미 후원하고 있는 곳들이 있다거나, 우리에게 하면 다른 신문사들도 다 광고를 해달라고 하기에 힘들다는 것이다. 또한 인맥으로 얽혀져 있는 한국사회에 바닥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어리고 부족한 자를 사용하셨다. 신문이 한국뿐 아니라, 미국의 7개 지역, 캐나다, 일본, 호주, 유럽으로 뻗어가게 하셨다. 돈이 넉넉해서 가능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결코 돈으로 확장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직원들이, 기자들이 '언론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가지고 사역을 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가슴 깊게 '언론 선교사'로서의 사명이 다가온 것은 이민사회에서다. 호주를 거쳐 뉴욕으로 오며 이민사회에 대해 많이 알게 됐다. 한국에서는 잘 몰랐던 목회자로의 고민도 알게 됐으며, 우리가 왜 '성령께서 이끄시는 화해의 신문'을 지향하고 있는지도 깨달았다. 신문사 운영의 어려움으로 눈물을 흘리고 기도하며 밤을 지새우기도 하고, '이 정도의 시험이면 충분하지 않냐'고 하나님께 하소연하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돈도 안 벌리는 일을 왜 하냐고 묻는다. 결혼자금은 마련했냐고 묻는다. 더욱이 목회자들이 그런 질문을 할 때는 '목사님은 돈 많이 버는 일을 하시지, 왜 목회를 하냐'고 되묻고 싶어진다. 선교하는 사람에게 왜 고생하며 이 일을 하냐고 묻는 것만큼 어리석은 질문도 없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어찌 감히 거부할 수 있겠는가?

또한 어떤 이들은 우리 신문사에서 일을 해보는 것이 어떻냐는 제안을 한다. 물론 재정적으로도 튼튼한 곳이기에 월급도 많이 받을 것이고, 여러가지 혜택을 받을 수 있기에 더 안정적인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선교사가 쉽게 사역지를 버리고, 더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곳으로 갈 수 있겠는가?

나는 '기독일보'라는 곳을 통해 언론사역을 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항상 첫 취재때의 마음을 잊지 않으려 하며, 취재 중 부어주신 성령의 은혜와 취재를 통해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하심을 감사드린다. 또 든든한 믿음의 이들과 동역할 수 있게 하심을 감사드린다.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광야를 맴돌지 않고 바로 가나안땅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오늘은 어떤 기사로 내 사명을 감당할 것인지 행복한 고민들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