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사 초기에 선교사들에 의한 교회 개척과 부흥의 결과는 이남보다는 상대적으로 평양을 중심으로 이북지역(관서지방)이 괄목할 정도로 우세하였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으나, 그 중에 사경회라는 성경 학습과 전도 훈련이 매우 효과적이었음이 여러 자료를 통해 입증되었다. 이는 지역 주민들의 종교 성향에 따른 면도 크게 작용되기도 하였다.
이 사경회는 남과 북지역의 모든 교회 성장에 토대가 되었으며 선교사를 돕는 조사들과 전도부인들과 후에 조선인 목사를 양성하는 지도자 교육의 기회가 되었고 토착교회 설립을 위한 교회의 자치 역량을 키워 주었다. 즉, 선교사 없이 조선인 사역자들에 의한 교회 개척과 운영과 성장의 기본적인 능력을 배양하게 된 것이다. 이는 마치 농부가 과수원을 만들고 묘목을 심고 성장하도록 모든 여건을 조성하고 자생력을 키워주는 공정과도 같은 것이다.
그 당시에 조선인들의 교육 수준은 매우 낮았고 문맹률이 거의 90%였으며 근대화된 교육 기관이 한성(서울) 외에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러하기에 선교사들은 학교를 세워 조선인들이 자국어를 읽고 쓰도록 하기 위해 교회가 세워지면 그 부설로 학교를 세웠다. 그 당시의 사경회는 선교사들에 의한 성경 강해식의 성경 공부가 주된 내용이었다. 사실상 선교 초기에는 선교사들도 조선어에 익숙지 못해 단순한 전도 수준에 머물렀으나, 점차 조선어 학습에 많은 진보와 조선인들과의 사역 관계와 생활의 적응으로 언어 구사의 능력이 향상되어서 성경의 교리도 가르칠 수 있게 되자 사경회도 가능해졌다.
사경회는 지도자 양육 과정만이 아니라 불신자들을 위한 전도 집회도 있었다. 이런 집회는 저녁에 이루어졌다. 이 집회에서는 인간의 원죄와 예수그리스도의 속죄 교리와 죄 용서함을 위한 회개를 촉구하였다. 이러한 교육 방식은 미국식 회중 집회였으며 이는 조선 기독교인들의 새로운 진리와 구원의 대한 갈망을 충족시켰기에 매우 적극적인 반응과 결실로 나타난 것이었다.
집회 시간에는 찬송과 기도와 더불어 회심을 결단하도록 촉구하는 부흥회식 집회였다. 이러한 사경회를 통해 조선인들은 죄의식이 각성되었고 예수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런 집회가 여러 날 진행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고 이는 교회를 부흥케하였다.
이 사경회는 평양뿐만 아니라 이북 전역으로 광범위하게 확산되어갔다. 평양에서 개최되는 사경회에는 전국에서 모여 들기 시작하여 남녀를 구분하여 남성을 위한 일반 사경회에는 매년 1월 첫 주와 둘째 주에 열렸다. 해마다 평균 8백 명에서 1천여 명의 정도가 참여했고, 이들은 대부분 가깝게는 10 여 킬로와 멀리는 160킬로 되는 먼 지방에서 걸어와 참여를 하였다. 이들은 모두 자비를 들여서 참석하였고 사경회 참석을 위해 소액의 비용을 지불하였다.
이때 도처에서 많은 사람들이 왔기에 평양에 거주하는 교인들은 참석을 자제하게 하였고 지방 방문자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었다. 2월에는 평양의 상인들을 위해 특별히 사경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그로인해 평양에서 장사하는 상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하였고 이들이 나중에는 평양과 평안도 지역의 상권을 주도하게 되었으며, 주일에는 상점들이 문을 닫고 주일 성수를 엄수하였다.
일반 사경회는 여덟 부분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아침에는 경건의 시간을 갖고 30분 정도 찬양을 하였고 오후에는 여러 선교사들과 조선인 교사들이 시간을 나누어서 성경 공부를 진행하였다. 이 사경회는 초기에 선교사들의 주도하에 진행되었으나 후에는 조선인 교회 지도자들이 진행하게 함으로 교회 지도자들이 점진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저녁에는 장대현교회에서 대규모 집회를 가졌는데, 자리가 부족하게 되자, 여자들은 제외시키고 남자들만 참석하였다고 한다. 물론 여성들만을 위한 사경회도 개최 되였었다.
평양선교 본부에서 진행하는 이런 사경회는 교회 전체의 믿음과 삶을 고양시키고 그들을 주안에서 믿음으로 하나 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사경회를 통해 배운 찬송가를 주변에 전파함으로 찬송가를 통한 전도도 이루어졌다. 이 당시에만 하더라도 성경책과 찬송가가 그렇게 대중화 되질 않았다. 또 문맹률이 높았기에 성경을 읽을 줄 아는 기독교인들도 소수였다. 이들은 찬송가를 반복하여 부름으로 가사를 암기했고 주기도문과 십계명과 사도신경도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암송하게 되었다. 그 당시 찬송가를 부를 때에는 큰 종이 궤도에 적인 가사를 보며 박수를 치면서 불렀다.
1904년 한 해 동안 약 60%의 등록 교인과 학습 교인이 1회 이상 사경회에 참석했으며 약 75%의 미조직 교회가 사경회를 개최했다. 이 비율이 점차 증가해서 전교인이 1년 1회 사경회에 참석하는 추세로 이어졌다. 이 사경회는 성격에 따라 일반 사경회, 교사 사경회, 장로, 집사, 영수, 전도부인 등으로 세분되었고 이런 사경회 중에는 더 수준을 높인 성경학교와 신학 교육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세분화되고 심화된 사경회는 조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삶을 변화시켰으며 평신도 제자화 의식을 높였으며 교회는 점차 자생력을 확보하게 되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