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중아일보 기사에 ‘장애인이 더 ’골초’다’라는 기사가 났습니다. ‘질병통제 예방센터(CDCP)에 따르면 성인 29만4000명을 대상으로 흡연율을 조사한 결과 장애인은 4명 중 1명꼴로 담배를 피우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일반인의 흡연율은 5명 중 1명이었다.’고 전하면서, 미국에서 1000만명이 넘는 장애인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흡연의 이유는 경제적인 낮은 소득수준과 장애로 인한 스트레스가 주원인이라고 합니다. 사실 우리는 환경적인 요인에 의해 희망과 절망의 갈림길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는 인간인 것입니다. 그것은 장애인이건 아니건 간에 더 어려운 상황에 놓이면 더 쉽게 인생을 포기하고 좌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건이 더 나아지면 삶에 활력이 일어나고 희망찬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장애인들의 좌절된 삶을 접하면서 안타까움이 있는 것은, 장애인을 향해서가 아니라 주위의 일반인들, 특히 그들을 도와야하는 교회와 교인들에 대해서입니다. 소설 “레미제라블(장발장)‘에서 주인공 ‘장발장’이 굶어 죽어가는 조카들을 위해 빵 한조각을 훔쳤다가 감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 빵을 훔쳐야하는 상황이 마치 장애인들의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장발장은 그래도 빵 살 돈이라도 벌 수 있는 건강이 있지만 장애인은 그것도 안됩니다.

그렇다고 누군가가 빵을 주는 것이 보장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정부에서 먹을 것을 안 주는가?’하고 반문합니다. 사실 그 먹을 것도 미국의 신분이 보장되어야 하고 특히 한국 이민자들은 그것마저도 쉽게 얻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먹을 것이 나온 다고해도 그것은 아주 기본적인 생활을 위한 음식이며, 장애인이 먹기 위해 사는 존재도 아닙니다. 먹는 것이 나온다고 장애인들에게 모든 필요를 채워 주었다는 생각은 너무도 인간차별적인 생각입니다. 장애인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리고 사랑하시는 특별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들도 일반인이 필요로 하는 똑같은 수준의 인간으로서의 욕구와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필요들이 현재의 사회의 가치기준에 대하여 능력과 경쟁력에서 미달되기에, 도태시켜버리고 소외시켜버린다면 장애인은 아주 희망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나마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어야 할 교회마저도 자체적인 생존에만 치중해서 본래 목적을 잃고 장애인들과 소외된 이들을 외면할 때는, 장애인은 ‘장발장’처럼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궁지에 몰리게 되고 그나마 살기 위해서 빵이라도 도둑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의 댓가도 장애인이 지불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실까요? 누가복음 12장에, 하나님께서 우리(청지기)에게 많은 소유를 맡기고,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하나님)에게서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라고 했는데, 그 집 종들이 배가 고파 굶어 죽어가며 곡식을 훔치고 죄 가운데 빠지게 했다면, 그 죄의 책임은 고스란히 청지기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46절에서는, ‘주님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이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아니한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청지기)에게 맡겨주신 주인(하나님)의 소유가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주인의 종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배고픔을 ‘나 몰라라’ 한다면, 하나님 진노(눅 12:46)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