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자의 어설픈 해석 뒤에 숨은 거짓 성경교사들
포도원 주인과 품꾼의 비유, 공평함의 원리
달란트의 비유, 자본주의 윤리
묵상이란, 입으로 읊조리는 반복 행위
성경 직접 읽고 적용할 훈련을 해야지
해석집 의존 묵상법, 게으르고 나태해
성서유니온이라는 단체가 발행하는 국내 유명 묵상집 <매일성경>에서, 예수님이 직접 하나님으로 비유하셨던 '포도원 주인'을 로마에 부역하고 품꾼을 착취하는 악덕 지주의 이야기로 각색해 큰 물의를 빚었다.
경제학자의 어설픈 해석 뒤에 숨은 거짓 성경 교사들
성인용도 아닌 청소년용 묵상집에 그런 내용이 실렸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할 길이 없는 부모로서, 저자가 누구인지부터 찾아보게 되었다. 예상과는 달리 이 연재물의 저자인 김재수 교수께서는(미국 인디애나 퍼듀대 경제학과) 노동자를 사랑하고 본인 자신도 일용직 노동자 가정에서 자라나 성공한 학자로서 열악한 처우 속에 살아가는 노동자를 위해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학자로 보인다.
그야말로 청소년에게 꿈과 희망의 롤모델이 될 만한 학자가 물의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이런 안타까운 사태의 배후에는 무책임한 성경 교사들이 자리한다.
문제는 언제나 처음 상황보다는 2차, 3차 전개의 단계에서 그 사안이 지닌 본색이 드러나는 법이다. 문자로 된 어떤 콘텐츠이든지, 통상 우려가 있는 텍스트의 경우는 편집에서 발행에 이르는 제과정에서 걸러지기 마련인데도 단편이 아닌 연재로 담았다는 사실은, 기고자 탓만으로 책임을 모면하기는 어려운 사안임을 방증한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이 연재물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수많은 일반 성도를 '좌파 대 우파'의 시각으로 갈라치는 일부 인사와 언론들의 몰지각한 행태이다. 해석은 자유로운 법인데, 언제나 '근본주의 기독교인이 말썽'이라는 식이다.
언제부터 우리는 청소년이 읽는 묵상집에서까지 쥐어짜는 해석을 봐야 했나?
묵상집인가 해석집인가?
청소년 묵상집을 유해 매체로 전락시키는 거짓 성경 교사들은 비겁하기까지 하다. 자신들이 선호하는 구태(舊態)적 사회주의 해석을 애먼 경제학자 손을 빌려 새 옷을 입은 듯 단장시켜 내놓기 때문이다.
이 경제학자에게 깊은 감명을 준 것으로 보이는 마커스 보그(Marcus J. Borg, 1942-2015)는 가톨릭 파계승 출신인 존 도미니크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 1934-)과 더불어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라는 구태로써 그리스도의 신성(deity)을 폐기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학자이다.
동성결혼 합법화나 젠더 이데올로기가 미국의 무기력한 현대 기독교를 상징한다면, 그런 운동이 있기 이전에 이런 학자들이 주도하는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란 모임이 먼저 있었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경에 대한 가치 해체의 가속화가 선행되었다는 뜻이다.
이런 아류 거짓 성경 교사들의 종용과 묵인 하에, 경제학이라는 옷을 입고 이번에 물의를 일으킨 소위 '성서 해석' 대상이 된 본문은 두 비유이다. 하나는 포도원 주인과 품꾼의 비유. 다른 하나는 달란트 비유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이 묵상집의 2021년 3-4월호에서 소개되었고, 포도원 주인을 지칭한 '주인과 품꾼, 누구의 이야기일까'는 5-6월호에 소개되었다.
순서부터 잘못되었다. 달란트 비유가 마태복음 25장에 나오고 포도원 주인과 품꾼의 비유가 20장에 나왔다면, 그 순서대로 소개해야 한다. 마태의 비유는 각 단편 전체가 연쇄적으로 이어진 한 판형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릇된 이해로 유포된 맥락을 바로잡고자 요약하면, 두 비유의 맥락은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해가 뜨는 한 포도원의 모습. '포도원 주인'은 해가 뜰 때부터 지기 직전까지 품꾼을 계속 데려왔다. ⓒ픽사베이 |
포도원의 주인과 품꾼의 비유: 공평함의 원리
마태는 포도원의 주인에게 '집 주인'이란 표현을 쓰고 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다는 것이다.
'집 주인'이란 말은 '상속받은 집(οἶκος)'과 그 상속을 받은 주인(δεσπότης)이란 말이 합쳐서 된 말이다. 소유 개념이 명백한 지주(地主)를 말한다.
이 주인은 어찌하여 제3시, 6시, 9시, 11시 등 출근 시간이 각기 다른 품꾼에게 동일한 일당(1 데나리우스)을 지급한 것일까? 제3시 출근자는 8시간 근무자였다. 그에 비해 제11시에 출근한 품꾼의 경우는 최소 1시간밖에 근무하지 않은 셈이다.
이 지주가 나간 장터는 아고라(ἀγορά)라는 곳이었다. '자유시장'을 뜻하는 공간이다. 그곳에는 제3시가 되었는데도 그냥 서 있는 노동자가 있었다.
제3시면 로마 시간법으로 오전 9시인데, 오전 9시부터 포도원 일을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다. 즉 앞서 자유시장에 일찍 나온 노동자들은 이미 그 지주가 포도원으로 다 들인 상태였다.
그런데도 어찌 된 일인지 지주는 제3시뿐 아니라 제6시, 9시에도 그렇게 자유시장을 나가고 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마치 놀고 있는 사람 구제하러 나간 것처럼 읽히나, 마태의 용법에 따르면 추수 시즌인 포도원은 자고로 종말적 환경이다.
작업 종료 시간을 맞추기 위해, 일손 조절을 위해, 주인은 분주하다. 이것이 제11시, 곧 오후 5시에도 지주가 자유시장에 나간 이유이다. 그는 거기서 발견한 노동자에게 이렇게 묻는다.
"너희는 왜 여기서 온종일 나태하게(ἀργός) 서 있는 거냐?"
그러자 그들이 이렇게 답한다.
"우리를 고용하는(μισθόω)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들은 지주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도 포도원 안으로 들어가라."
그 시각이 포도원 작업 종료 1시간 전이었다. 문제는 이 지주가 출근 시간이 각기 다른 품꾼에게 동일한 일당(한 데나리우스)을 지급할 때 발생했다.
품꾼이 임금 교섭할 처지가 못 되었다는 저 경제학자의 주장은 거짓말이다. 오전에 온 자가 품삯에 항의했는데, 이 항의의 소리에 이입된 감정은 다음 역본에 가장 잘 드러나 있다.
"막판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을,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십니까(공동번역)?"
이 항의에 대한 답은 이것이다.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실제로 지주는 제3시 이전에 들인 품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씩' 약속했다.
'에크 데나리우 텐 헤메란(ἐκ δηναρίου τὴν ἡμέραν)'
=for a denarius for the day(한 날에 한 데나리우스)
이 지주는 공정했다고 마태는 말한다. 1시간 일한 자가 왜 같은 한 데나리우스를 받았는지, 그들이 어떤 노약자였는지, 아니면 어떤 (탁월한) 기술자였는지, 그것은 알 길이 없다.
왜냐하면 이 '한 날에 한 데나리우스'라는 '비율'은 모든 사람의 수고를 평준화하는 사회주의적 비율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수고를 균등하게 하는 시간적 황금률이기 때문이다.
노동력이 약한 사람이 한 끼에 반 공기만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것처럼 기술을 터득하고자 각고의 노력을 한 사람이 1시간만 일했다 해서, 한 끼니를 반 공기만 먹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 주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오? 당신은 나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지 않았소? 당신의 품삯이나 가지고 가시오. 나는 이 마지막 사람에게도 당신에게 준 만큼의 삯을 주기로 한 것이오.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 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마 20:13-16, 공동번역)."
이 경제학자의 청소년기는 과연 꼴찌였을까? 첫째였을까?
어쨌든 이 이야기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로 시작했던 산상수훈의 해설로서, 마태의 두 포도원 이야기 중 전편에 해당한다(마 20:1-16; 21:33-46).
전편인 이 이야기는 오병이어의 법칙, 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는 광야의 만나 법칙에서 유래하였다(cf. 출 16장).
▲달란트 비유에 나오는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이를 땅에 파묻는 모습. ⓒjesuschristformuslims.com |
달란트의 비유: 자본주의 윤리
김 교수는 <청소년 매일성경> 3-4월호 편에서 미(美) 리버티대학교 설립자 고(故) 제리 폴웰 총장의 달란트 비유를 인용했다.
"예수님은 자신이 나눠 준 달란트를 시장에 투자하지 않은 하인을 비난했다. ... 이 우화에 따르면 예수님은 자본주의자라고 봐야 한다"라고 적용한 제리 폴웰 총장의 사례를 인용하면서, 유명 목회자들이 이 비유를 '능력주의'를 지지하는 데 이용한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마태의 본문에서 "내 돈을 취리하는 자에게 맡겼다가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해야 할 것(이 아니냐!)"는 주인의 질책에 담긴 경제관은 자본주의가 맞다. '취리하는 자'란 명칭도 은행가(τραπεζίτης)를 이르는 표현이다.
하지만 여기서 자본주의란 현대적 의미의 경제자본주의를 이르는 개념이 아니다. 에토스(윤리) 자체를 이르는 개념임을 유의해야 한다.
고대 문헌인 성경에서의 자본주의(현대적 자본주의로 오해할 만한) 맥락은 대부분 윤리와 동의어로 읽어도 무방하다.
특히 마태의 본문에서 빈번하게 마주하게 되는 노골적인 자본주의 표현이나 문맥은 백 퍼센트 윤리(ethos) 텍스트라 보면 무리가 없다. 자본주의란 '윤리' 자체였던 셈이다.
이를테면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는 이 무지막지한 성장 위주의 명제에서, 그 '무릇 있는 자'가 소유한 달란트란 환금성 물질이 아니라 사랑과 죄 사함(탕감)의 자질로서의 달란트 은유이다.
무릇 '돈' 있는 자가 받아 풍족하게 되는 게 아니라, 무릇 '사랑'을 소유한 자가 더욱 사랑에 풍부해지는 원리로 임한다. 상대적으로 사랑과 용서에 인색한 자는 그나마 있던 사랑도 고갈되는 이치이다. 고갈되어 가는 이 심신의 상태를 우리는 유기(遺棄)라 부른다.
자고로 바울은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다(롬 1:28)"고 말함으로써 이 원리를 보충한다.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는 원리이다.
이 같은 핵심 윤리가 담긴 마태의 본문이 바로 다섯 달란트 받은 자, 두 달란트 받은 자, 그리고 한 달란트 받은 자의 비유를 구성했다.
우리는 이들 세 사람이 가리키는 기호(記號)가 무엇인지까지 특정할 수 있다. 마태의 비유는 길게 늘어진 연쇄 속에서 구현되기 때문이다. 포도원 주인과 품꾼의 비유가 산상수훈의 해설이었던 것처럼.
주인과 품꾼의 비유가 만나의 법칙에 대한 적용이었듯이, 우선 다섯 달란트는 '오경'을 표지한다. 그리고 두 달란트는 '두 계명(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표지한다.
마지막으로 한 달란트는 (유대교와 구별되는) 기독교인의 '새 계명'을 표지하고 있다. 앞서 품꾼의 비유가 종말적 추수의 시간 상황이었다면, 이 파묻힌 한 달란트는 한 마디로 재림(다시 돌아온 '집 주인'과의 대면)의 상황에 대한 표지인 것이다.
이 한 달란트야말로 단순 자투리가 아닌, 궁극적 기독교 윤리로 표지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이 한 달란트는 앞서 마태복음 22장에서 두 계명,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한 계명'으로 압축했던 시도를 비유의 연쇄로 이어받는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통한다는 암시가 비유에서 작용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모순이다. 초대교회의 당혹감이 고스란히 서려 있다(마 22:34-40).
어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다른 사랑으로 대체할 수 있단 말인가. 논리적으로는 모순이요, 법정적으로는 난제이다.
하지만 마태는 이 모순과 난제를 '한 달란트'를 통해 불식시키려고 다시 한 번 시도한다. 이 모순과 난제에 대한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반응이 장사를 안 하고 땅 속에 묻어만 두었다는 행태로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무엇을 묻어 두었는가? 다섯 달란트에서 두 달란트로, 두 달란트에서 다시 한 달란트로 축소된 '한 계명', 즉 다른 말로 하면 '가장 큰 계명'을 묻어 두었던 것이다.
마태는 한 달란트를 파묻어버린 이 사람이 누구인지까지도 특정할 수 있도록, 비유의 연쇄로 도치해 두었다.
그는 바로 밭에 감춘 보화의 비유에서(마 13장), 그 밭에 보화를 감췄던 장본인이다. 감추고서 잊어버린 채 소중한 땅을 팔아넘긴 바로 그 자이다.
왜 보화를 땅에 파묻었는가. 그것은 주님에 대한 오해에 기인한다. 그는 주님을 굳은(엄격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고,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분으로 알고 있다.
심지도 않고 거두려는 망상 속에서 하나님도 그러할 것이리라 여기는 이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그는 다름 아닌 사회주의자이다. 심지는 않고 파묻는 이론에만 능한 해석자로 자처하면서, 해석만을 본업으로 삼기 때문이다.
성장한 공동체나 교회, 기관, 기업을 비판할 줄만 알았지, 성장시키는 권능은 결여된 자이기 때문이다. 자본은 혐오하지만, 자본의 진정한 굴레는 결코 벗지 않으려는 자이기 때문이다.
현대의 사회주의 성경교사들은 자본주의와 배금주의(물질숭배)를 동일시함으로써 자본주의를 패퇴시키려 애쓰지만, 자본주의와 에토스의 이 같은 동일성/상관관계는 그리스도교 초기 공동체의 설립 과정에서부터 발견되는 공동체 형성에 있어 중요한 요체이다.
현대적 의미의 자본주의 효시에 해당하는 칼빈의 자본주의 윤리가 여기서 탄생하였다.
에필로그
이번에 물의를 빚은 성경 묵상집의 어설픈 사회주의 해석 문제가 아니라도, 이런 성경 묵상집 또는 그 아류의 책자를 이용한 QT/묵상의 태도는 재고해야 할 일이다.
묵상이란 본래 그 어의에 나타나 있듯이 입으로 읊조리는 반복 행위를 말한다. 자기 자신이 성경을 직접 읽고 직접 적용할 줄 아는 훈련을 해야지 언제부터 해석집에 의존하는 묵상법이 이를 대신하게 되었는가.
목회자나 교사가 이런 방식을 권한다면 그는 매우 게으르고 나태한 품꾼일 것이다.
▲이영진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 |
이영진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 전공 주임교수 | 크리스천투데이 칼럼니스트, 월간 《월드뷰》 편집위원 및 편집 디자이너로 활동 중이며, 연구 저서로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홍성사),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사용설명서》(샘솟는기쁨),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홍성사), 《자본적 교회》(대장간), 《요한복음 파라독스》를 발표했고, 역서로 《크리스티안 베커의 하나님의 승리》(성서와교회연구원)를 내놓았다. 그리고 원어성경 학습 앱 프로그램 파워바이블 앱 개발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