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목사님이 친한 목사님으로부터 초청받아서 집회를 인도했는데, 집회 후 자신의 설교에 대하여 친구가 충고를 해주었다고 합니다. 설교가 참 좋은데, 불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칠판에 '불'이라고 써 놓고 설명하는 식이라는 것입니다. 차라리 종이에 불을 확 붙여서 보여주는 것이 더 분명하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친구의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이 무난한 설교에 안주해 있었음이 깨달아지면서 정신이 번쩍 났다고 합니다. 그동안 교인들의 "은혜 받았다"는 말에 속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난한 설교는 죽을 쑨 설교보다 더 나쁘다는 것을 그 때 깨달았다고 합니다. 무난하다고 생각하니 더 이상 진보가 없었던 것입니다.(유기성, 『예수 소망』. 두란노. P.110~111)
나는 좋은 교회라고 소문난 큰 교회를 다니고 있고, 남편도 안정된 직장을 다니며, 아이들도 말썽 피우지 않고 말 잘 들으니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해주시고 복 주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누가 알겠습니까? 요한계시록에 보면 일곱 교회가 나오는데,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어~.' 그런데 주님은 실상을 알려주셨습니다.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계3:17)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겠다.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내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계3:15-16)
고난 없이 평탄한 삶을 사는 것은 우리의 바람이고 소망입니다. 삶이 때로는 전쟁처럼 무섭고 치열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경쟁이 치열할수록, 생존에 필요한 안전이 보장되지 않을수록, 인생의 위기를 자주 겪을수록 우리의 소박한 바람은 더욱 간절해집니다. 우리의 이러한 간절함을 그 누구보다 잘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벅찬 고난을 허락하시곤 합니다. 모든 고난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아니지만, 어떤 고난이든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하며 기도하면 분명 그 고난조차 나에게 유익이 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유익만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뜨겁게 체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내가 알게 되는 것. 이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간절한 소망 아닐까요? 예수님은 우리를 적당히 좋아하지 않고, 이만 하면 됐겠지 정도의 사랑을 하신 것이 아니라, 가장 소중한 목숨을 주면서까지 사랑해 주셨으니까요.
밭에 감추어진 보화를 발견한 농부에게는 남들이 모르는 기쁨이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느끼며 사는 사람만큼 행복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도 그런 기쁨과 행복을 누리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