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미국 프린스턴대학 박사가 되어 돌아온 이승만 박사는 '한국교회핍박'을 저술하였다. 한성감옥 사형수였던 이승만 박사는 미국박사가 되어 편하게 살 수 있었는데도 다시 조국에 돌아왔던 것이다. 일본이 조선을 먹었지만 정신을 먹지 못했다고 하며 일본이 아무리 한국교회를 핍박해도 하나님이 세우셨고 세상권력으로 기독교회를 타파하려함은 기독교가 독립운동의 정신적 원천이기 때문이라 했다. 그 이유를 다음의 8가지로 정리하였다.
1) 한국교회는 자유롭게 모일 수 있기 때문이다.
2) 기독교안에는 활동력이 있기 때문이다.
3) 기독교회는 합심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4) 교회를 통해 국민의 원기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5) 교회에서 청년 교육을 힘쓰기 때문이다.
6) 교인들이 우상을 섬기지 않기 때문이다.
7) 선교사들의 도의적 영향력이 한국에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8) 혁명사상의 풍조가 동양에 전파되기 때문이다.
특히 <기독교인 105인 재판 사건>이 있었다. 1911년 가을부터 교회에 대한 핍박이 더욱 심해져서 한국교인들을 각처에서 포박하고 학대하였다. 교회와 공부에 힘쓰던 교사와 학생들이 사슬로 결박당하여 연행되어 기차로 서울까지 호송되었으니 목사 장로 그밖의 모든 지도자들이 차례로 잡혀감으로 서울 지방 할 것없이 도처에서 이러한 체포가 이어졌다. 이렇게 실종된 가족을 찾아 헤매는 부모처자들이 부르짖으며 거리에서 방황하여도 호소할 곳이 없었다.
일본인들의 신문에 매일 보도되는 말이 기독교 신자들이 전무후무한 큰 범죄를 저질렀으므로 그 용의자들을 낱낱이 잡아들여 가둘 터인데 먼저 수감된 자들을 심문하는 중이니 추가로 잡힐 사람들이 수백 명에서 수천 명에 달할 것이라면서 강도 높게 으름장을 놓았다. 그 가운데 윤치호 씨의 집을 군인과 경찰들이 포위하여 체포한 뒤 그 안팎을 샅샅이 수색하여 휴지조각 하나까지 남김없이 다 뒤져갔으니 서울과 그 밖의 지역 모든 기독교인들은 이유도 없이 바늘방석에 앉은 것과 같았다.
수감된 사람들은 신앙심이 독실하여 인격이 올곧아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고 교회보에서 보도하였다. 하물며 윤치호 같은 사람은 동서양에 널리 알려진 인물일 뿐 아니라 기독교의 큰 정치가이다. 일본의 선교사들에 대한 공갈협박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없으나 선교사들은 이 사실을 밝히기 위해 공개 재판을 청구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법관들이 어찌나 공평치 못하였던지 조작된 진술서와 일본의 잘못을 가린 통역도 앞뒤가 맞지 않는 결과를 만들어 오히려 비웃음거리가 되고 일본의 불법이 세상에 알려져 지탄과 비난을 받았다.
만일 한국교회를 아주 없애 버리려 한다면 오래전 로마 황제 네로의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 될 것이며 조선의 대원군이 동학을 일으켰던 것이나 청국의 서태후가 의화단을 자초했던 것과 같은 비웃음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마침내 한국교회를 더욱 공고케 할 따름이니 이는 기독교회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워진 까닭이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런 신앙을 갖게 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겨도 신앙을 목숨처럼 지켰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지금의 교회탄압을 보며 그때와 너무나 비교가 되어 적어본다. 또한 교회탄압으로 몰고 가는 모든 작업들은 오히려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워진 까닭이다.
정영선(한국여성가족정책원 원장, 태아생명살리기 위드유캠페인 대표, 다음세대학부모연합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