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문화계, 인간과 세계 고차원적 이해 콘텐츠 생산
한국 문화계, '적정 수준' 단순·명확하고 진부한 목표
진정성 있는 자기 이해와 창의성 회복 노력 뒷받침을
◈문화예술의 발전: 문화 자주국과 문화적 속국의 문화발전 차이
미국 선교사들과 외교관들이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한국 민중의 생활과 문화 수준을 보고 그 후진성에 크게 실망한 것에 대해, 오늘날 한국인들이 보이는 반응은 대개 한결같다. 당시 미국인들이 오리엔탈리즘에 빠져, 편견을 가지고 조선인들의 문화를 평가했다는 것이다.
그 시절 미국인들이 아시아인들에 대해 다분히 차별적인 문화적 편견을 가졌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19세기 말 당시 한국과 미국 사이에 실제로 문화적 격차가 크게 벌어져 있었던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미국의 문화 수준이 독립 직후인 18세기 말경만 해도 동아시아 지역보다 현저하게 앞서 있었다고 할 수 없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서부를 향해 개척민을 내보내던 시기, 미국의 문화적 수준은 결코 높은 것이 아니었다.
19세기 중후반 대단히 빠른 속도로 산업혁명을 성공시키고 근대적 패권국가의 틀을 갖추기 전까지, 미국의 기술 문명이나 문화 수준이 한국에 비해 월등하게 높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조선에 노비제도가 있었듯 미국에는 노예제가 있었고, 서부 개척 시대 미국인들의 평균적 생활상은 거의 야인(野人)들의 그것과 크게 다름이 없었다.
그렇지만 불과 100년 사이 한국은 문화적으로 정체될 뿐 아니라 크게 후퇴하고 있었던 반면, 미국은 세계 선진국 수준의 문화적 역량을 일궈냈다.
여기에는 다양한 요인들이 관여되어 있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요인은 두 나라 국민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의 차이였을 것이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정치, 행정 측면에서 실질적인 자치를 누렸지만, 정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는 대국이자 상국인 명, 그리고 청에 복속되어 있었다. 자주적인 문화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거의 없는 문화적 속국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유교 사상에 입각해 지극히 자민족 중심적이고 폐쇄적인 문화 성향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의 입장에서 문화란, 자주적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대국인 중국의 것을 수입해 와서 거기에 약간의 변형과 각주를 추가하면 되는 것에 불과했다.
반면 미국은 독립전쟁 승리 후 정치, 행정 측면에서만 아니라 문화 차원에서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확고한 자주독립 노선을 걸어야 했다.
그동안 미국 문화의 뿌리 역할을 했던 영국과는 외교 관계가 크게 악화돼 재차 전쟁까지 치를 정도였고, 남아메리카와 서인도제도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 확대하려는 유럽 열강의 세력을 견제해야 했던 까닭에, 다른 유럽 국가들과도 친하게 지내기가 쉽지 않았다.
19세기 후반 미국의 산업혁명이 성공해 유럽에서 대규모 이민이 유입되기 전까지, 미국과 유럽 사이의 문화적 유대감은 희박해져 있었다. 이 시기 미국 고유의 문화, 문명 발전을 주도한 것은 첫째로는 청교도 정신에 입각한 교육열이었고, 둘째는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정복욕이었다.
미국인들은 기독교 신앙이 가르치는 진취성에 기대어 자신들의 정치적, 문화적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데 열중했다.
물론 그 진취성이 세속적인 방식으로 잘못 이해되어 미국식 제국주의로 발전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지만, 미국이라는 나라의 국력만 아니라 문화적 역량까지 빠르게 증대시키는 데 기여하기도 했던 것이다.
조선 사람들은 그들이 최고라 생각했던 중국의 문화를 엉성하게 베껴 놓고 자신들이 소중화(小中華)라며 자화자찬하고 안주하기 바빴던 반면, 미국은 유럽을 비롯해 널리 열린 전 세계를 주시하며 자신들의 문화적 역량과 그 위치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평가하며 미진함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근거없는 자신감과 정확한 주제 파악, 이것이 한국인들과 미국인들이 각자의 문화를 평가하는 태도의 근본적인 차이였던 것이다.
◈문화예술의 목표: 기독교적 문화와 한국적 문화의 태도 차이
최근 개봉된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를 비롯해서 해외 영상 콘텐츠의 서사 및 연출 요소들을 엉성하게 짜집기하는 데 급급한 한국영화 전반의 행태와, 그 속에서 간간이 얻어낸 작은 성과들을 가지고 세계 영화시장을 제패한 것처럼 부산을 떠는 언론과 친정부성향 유튜버들의 행각을 보고 있자면, 오늘날 우리 한국인들이 문화를 바라보는 태도가 조선 시대와 크게 변한 것이 없음을 재차 확인하게 된다.
한국인들에게 문화의 발전이란 치열한 고민과 창작의 고통 끝에 얻어내는 소산이라기보다 선진국에서 발전시켜 놓은 것들을 빌려와 살짝 가공하거나 버무리면 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 듯하다.
수백 년 이상 그런 식으로 문화의 생산국이 아니라 소비국, 모방국으로만 지내왔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 당연함 때문에 한국인들의 전반적인 문화의식 수준이 크게 뒤쳐지게 된 점은 애석한 일이다.
한국이 여타 문화 후진국들과 마찬가지로 지적재산권 개념이나 연구윤리 개념이 희박한 것 역시 이러한 사정과 깊은 연관이 있다. 영화의 경우 소송에 휘말릴 정도의 노골적 표절만 아니라면, 출처 표기 없는 모방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학문 분야에서는 다른 학자의 연구 성과를 참고할 때 반드시 그 인용 출처를 밝혀야 하는데 이 당연한 의무를 지키지 않는 이들이 학계에 태반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출처 표기를 성실히 하면 스스로 고민하고 논의한 바가 거의 없다는 점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일전 모 대형교회 목회자도, 학계에서 명성이 높은 저명 성서학자나 종교학자도 이런 문제로 인해 구설수에 오른 바 있다.
한국의 대표 여류문인 중 하나로 손꼽히는 신경숙 작가도, 조국 전 법무부 장관도 표절 문제로 인해 각각 창작 윤리, 연구 윤리 측면에서 커다란 오점을 남긴 바 있다.
아무리 제반 인간사가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전 1:9-10)" 하더라도, 또한 해석학적으로 볼 때 "파롤과 글쓰기가 언제나 독서에서 많은 것을 빌려오는 훔치기(데리다, <글쓰기와 차이>)"라 하더라도, 어떠한 독창성도 찾아보기 힘든 명백한 모방과 표절에만 급급하는 행태를 문화적 발전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기독교 세계가 오늘날 전 세계 문화 조류를 선도하는 이유는, 항상 분명한 주제파악의 태도가 근거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서구 문명에서 그 오리지널리티를 인정받는 문화 콘텐츠들은 인간, 세계, 존재에 대한 창작자의 끊임없는 관심과 고민을 반영한다.
위대한 문화 창작자들은 지금 추진하고 있는 창작 방향이 인간의 현재와 미래를 조망하는 데 유의미한지, 올바른 방향을 따르고 있는 것인지 치열하게 고민한다.
이는 기독교 세계 문화예술이 기본적으로 순전한 미학적 향유나 자기만족을 지향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신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데 열중하면서 발전돼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서구 문화예술계가 항상 인간과 세계에 대한 보다 고차원적 이해를 제공하는 콘텐츠를 생산하는 데 열심을 낼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으로 작용해 왔다.
반면 한국의 문화 예술은 그 목표 지점이 명확하고 단순하게 제한돼 있다. 문화 선진국 콘텐츠를 모방해 타국에 위신이 깎이지 않을 정도의 문화 수준만 갖추자는 것, 문화 후진국으로서 오래된 열등감을 벗어날 정도의 문화 수준만 유지하자는 것, 이것이 한국 문화의 진부한 목표라 할 수 있다.
한국인들이 유독 노벨문학상, 아카데미상, 빌보드 차트 순위, K대중문화 등에 집착하는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충분하게 설명된다.
정서적인 삶을 풍성하게 하고 자신과 세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열등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알량한 문화적 성과를 자랑하기 위해 창작 활동을 이어가는 한, 한국 문화계 어느 영역에서도 조잡한 모방물 이상의 성과를 얻어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과거 중국이 동아시아 지역의 확고한 문화 선진국으로 추앙될 때는 중국을 모방하고, 이제 미국이 문화 선진국 지위를 확보한 상황에서 미국의 문화 콘텐츠 모방에 열중하는, 그것도 어설픈 모방에 그치고 마는 수준이 한국 문화예술계의 현실이라 할 수 있다.
배울 것은 적극적으로 배워야 하겠지만, 모방된 요소를 단순히 뒤섞고 나열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것들을 바탕으로 진정성 있는 자기 이해의 고민과 창의성 회복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우리 문화의 발전은 요원한 일일 것이다.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