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통일부 장관 후보자의 청문회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 정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이인영 후보자는 '이승만이 아니라 김구가 국부였어야 했다'고 생각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이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남한에 단독으로 세운 것이 참으로 한탄스러운 일이고, 좌우 합작을 주장했던 김구 선생께서 대통령이 되지 못한 것이 분단의 원인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요즘 우리나라는 역사에 대한 해석을 두고 국민들 간에 전에 없던 첨예한 대립을 보인다. 특히 이승만이 세운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의미에 대해 너무도 많은 오해가 있는 것 같다. 역사는 사실을 기반으로 당시의 상황과 형편을 살펴보면서 이해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지금의 판단과 잣대로 날카로운 칼을 들이대고 있기 때문에 극단으로만 치닫는 게 아닌가 싶다.
필자가 이승만 대통령에 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그전에는 학교에서 배운대로 '이승만은 3.15 부정선거로 쫓겨난 늙은 독재자'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한국사회가 오늘날 이렇게 어지러운 이유가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르게 가르치지 않은 탓인 듯하여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설계도를 그린 이승만이라는 인물에 대해 좀 더 실체적으로 접근해 볼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먼저 그가 한성감옥에서 회심하고 난 후, 썼다는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읽어 보았다. 이 책을 통해 구한 말, 패망한 나라를 바라보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젊은 선각자의 예사롭지 않은 면모를 발견했다. 내친김에 이승만에 대해 좀 더 객관적인 사실이 알고 싶어져서 1942년부터 1960년까지 이승만 대통령의 홍보자문으로 일했던 로버트 올리버 박사가 쓴 <이승만 없었다면 대한민국 없다>라는 책도 읽게 되었다.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한국 사람이 쓰지 않아서 비교적 편견이 덜 할 것 같았고, 내용 또한 이승만과 주고받은 편지들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정리해 놓은 것이라 역사적인 사료로써 객관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너무 아렸다. 1945년 해방 이후, 각지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쓰던 민족의 지도자들은 각자 해방된 조국에 대한 다른 그림들을 가지고 귀국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미국과 소련의타협과 갈등 속에 신생 독립국의 운명이 어찌 될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시기였다. 이때 소련은 일년내내 얼지 않는 항구를 손에 넣어야 하는 필요에 의해 김일성을 내세워 북한 땅에 괴뢰정권을 재빨리 세우고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려는 준비를 착실히 해나갔다.
반면 미군정 하의 남한은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다양한 정치적 갈등들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어지러운 형국이었다. 그러는 사이 북한은 무장을 단단히 가다듬어 드디어 1950년 6월 25일, 동족에게 총을 겨누는 기습공격까지 감행하게 된 것이다.
1945년부터 1948년 사이에도 북한에 살던 많은 분이 남한으로 탈북을 했다고 한다. 특히 그 3년 동안 공산주의가 무엇인지를 뼈저리게 경험했던 북한의 기독교인들이 대거 월남하였기 때문에 6.25 동란이 일어나기 전부터도 피란민들이 많았다. 그래서 북한 동포들을 위하여 대한민국의 국회는 앞으로 치를 남북한의 자유민주적 총선거의 실시를 기대하며 북한 측 대표의 의석을 남겨두기까지 했다.
당시 민족의 지도자라고 했던 많은 분이 각자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서로 갈등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가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처음부터 공산주의가 거짓된 사상이며 인류를 지옥으로 끌고 갈 사상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그는 공산주의란 마치 전염병인 콜레라와도 같아서 박멸해야 하는 것이지, 어르고 달래며 공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38도선 이북에 공산주의를 남겨 두고서는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가 절대 오지 않을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좌우 합작을 통해서라도 우리 민족의 통일을 간절히 바랐던 김구나 김규식과는 전혀 다른 생각과 판단을 이승만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당시의 국제 정세에 정통했을 뿐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라는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원리와 원칙에 충실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우방인 미국으로부터도, 국제연합으로부터도 '말이 통하지 않는 고집스러운 늙은이, 독재자'라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선견지명과 통찰력을 이해할 수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기에 그는 너무도 고독한지도자였다.
그런 그에게 늘 힘이 되어 준 것은 국민들이었다. 누가 뭐래도 이승만을 믿고 신뢰한 국민들의 지지에 힘입어 국내의 많은 정치적 반대와 해외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의지대로 국정을 이끌고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생의 말기에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부정선거라는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이승만은 그가 가장 사랑했던 국민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었고, 결국 그의 인생 전체가 오명을 뒤집어쓰고 폄하되어 버리고 말았다.
한 사람의 인생은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평범한 필부 필녀의 삶도 그러할진대 거대한 역사의 회오리 속에서 민족과 국가의 운명을 고스란히 어깨에 지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의 인생을 어떻게 그리 단순하게 평가할 수 있겠는가? 그의 고뇌와 슬픔을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이승만의 공과 과는 이런 복잡한 면면을 고려하여 다시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다만 지금 우리는 그가 설계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과 그가 우리에게 선물로 준 한미동맹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넘치는 자유와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며 살고 있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그의 꿈과 설계가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이것이 김구가 아니라 이승만이 국부로 추앙받아야 할 이유이다.
정소영(미국 변호사, 세인트폴 세계관 아카데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