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사람이 존재 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의 규범 때문입니다. 믿음의 규범으로 쓰임 받던 엘리야가 오직 나만 홀로 남았거늘 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렇듯이 우리도 간혹 믿음을 저버림으로 인하여 홀로 남았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나도 홀로 남았음을 느끼게 됩니다. 믿음의 규범이 무너져, 기준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비정상이 정상이 되고, 정상이 비정상이 되는 것입니다. 시편기자의 탄식처럼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을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러다 세상의 흐름에 동조하거나 틀린 걸 알면서도 그냥 동조해 버립니다. 마땅히 저항해야 할 사람조차도 냉소로 일관하게 됩니다. 또한 의도적으로 현실로 부터 거리를 둡니다.
말이 강한 자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말로 사람을 압도를 합니다. 말로 거짓말을 합니다. 그 거짓말을 멀리 있는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합니다. 그래도 성이 차지 아니하면 보일 때와 보이지 않을 때의 말이 달라지는 아첨을 하게 됩니다. 두 마음으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중 잣대를 들이 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 편일 때와 적일 때의 판단 기준이 다릅니다. 심지어는 많이 교만합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우리 혀가 이길 것이라고.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라고 외칩니다. 그것은 세상의 말 따라가면, 편해질 거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굳이 모난 인생 살지 말자는 생각의 유혹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강한 사람의 특징은 다릅니다. 말과 말씀 중에 말씀을 선택하게 되면 압도적으로 사람의 말을 꺾을 수 있습니다. 항상 말씀을 선택해야 합니다. 특히 홀로 남았다고 느낄 때 사람을 찾지 말고 말씀을 찾아야 합니다. 말씀을 붙들 면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고 하나님이 일어나시어 약한 자를 붙으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가난한 자요, 고아와 과부까지라도 모두 안전지대에 두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같이 강력한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지키고 보전하여 승리케 하십니다. 그러므로 혼자라는 고립감에서 벗어나는 길은 사람을 붙들어 답을 찾기보다 말씀 붙드는 것입니다.
도종환 시인이 쓴 뒷자리 시에 "맨 앞에 서진 못했지만, 맨 나중까지 남을 수는 있다."합니다. 맨 앞에 서는 것은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 능력이 부족하면 맨 앞에 서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맨 나중까지 버티는 것은 가능하다."합니다. 남보다 뛰어난 논리나 대중을 휘어잡는 능력은 없지만. 한번 먹은 마음만은 버리지 않을 수는 있다는 겁니다. 세상의 흐름과 말에 타협과 변절이 잇을 수 있지만 이 세월 속에 드릴 수 있는 한 가지는 맨 나중까지 남을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에는 견딤과 버팀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믿음은 앞자리용어가 아닌 뒷자리용어로 버티며 견디는 용어입니다. 믿음으로 버티면 승리하기 때문입니다.
[김병규 칼럼]고독 할 때 말이 아닌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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