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둘로 나누라면 욕망을 따라 사는 인생과 필요를 따라 사는 인생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둘의 인생의 결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자신은 물론 남에게도 필요의 인생을 살게 하지만, 마귀는 자신은 물론 남에게도 해를 끼치는 욕망으로 살게 이끄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아합왕은 허망하게 죽게 됩니다. 욕망을 따라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위험한 인생임도 불구하고 필요의 인생을 살았기에 통일왕국의 왕이 됩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남을 위하고 자신을 위한 필요의 인생을 살려하기보다는 자신과 남에게까지 해를 끼칠 수 있는 욕망의 삶을 살기를 더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필요를 채우며 살면, 인생에 낭비가 없습니다. 그래서 정서적인 위로나 지적 만족을 위해서 성령께서는 전인적인 필요를 채우는 쪽으로 인도하심으로 풍성해지고 건강해 집니다. 그래서 만족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동시에 다른 사람의 필요를 보는 눈이 열리게 됩니다. 그래서 남을 돕게 되기에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 일으켜 세워주게 됩니다. 이렇게 필요는 나의 필요요, 상대의 필요이기 때문에 해결책이 단순합니다. 초대교회는 서로의 필요를 채우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성도들끼리 자기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필요한 곳으로 인도를 하십니다.
반면에 욕망은 채움이 불가능합니다. 허상이기 때문입니다. 욕망은 하나님이 없음을 전제하기 때문에 남의 시선과 남의 관심에 매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욕망은 자랑거리를 찾습니다. 욕망은 자기 자랑을 위해서 이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웃을 불편하게 만들고. 분노하게 만듭니다. 결국에는 욕망이라는 중독으로 이끌게 됩니다. 그래서 뭘 해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관심과 부러움을 만들어 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욕망은 자랑을 위해서 이웃이 필요합니다. 불편하게 만들고. 분노하게 만들고. 비참하게 만듭니다. 관계까지 파괴시켜 사람이 떠나게 만듭니다. 욕망의 마지막이 허망이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필요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가 믿음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쁘게 살면 풍성해집니다. 그러나 욕망을 따라 사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항상 두려움이 있습니다. 미래가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붙들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필요가 채워져도 불안한 것입니다. 내일 채워진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필요중심 인생으로 재편해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쉬운 쪽으로 움직이게 되고. 인생이 짐이 아니라 기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헛된 삶은 지금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새롭게 살려 해도 잘 살 시간도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김병규 칼럼]헛된 삶은 지금까지 삶으로도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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