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층과 비지배층 간의 긴장과 갈등은
근본적으로 인간 자기신격화 욕망 때문
순전한 신앙만이 온전한 공동체 질서를
이번 박욱주 박사님의'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에서는 넷플릭스 TV 시리즈로 방영중인 <설국열차>에 대해 분석합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를 리메이크한 이 드라마는 제니퍼 코넬리, 다비드 디그스, 앨리슨 라이트, 믹키 섬너, 수잔 박 등이 출연합니다. -편집자 주
인류와 종말: 종말 직전에 이르러서도 사라지지 않는 인간의 고질적 죄성
지난주 월요일(5월 25일) TV 시리즈 <설국열차(Snowpiercer)>가 넷플릭스를 통해 국내에 공개됐다. 동명의 프랑스 그래픽 노블을 영화화한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2012)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영화 <설국열차>의 설정들을 그대로 가져오지만, 전체 스토리 라인에는 새로운 요소들이 많이 첨가되었다. TV 시리즈 길이에 맞게 보다 차분한 호흡의 현실적인 서사를 선보이고 있다.
영화판 <설국열차>는 기독교 신앙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쟁점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열차를 움직이는 엔진, 열차 제작자 윌포드, 그리고 열차 내부를 지배하는 신분 질서, 이 세 요소를 삼위일체 하나님에 빗대 신격화하는 장면들을 통해, 기독교 신앙에 대한 세속주의적 비판의식을 노골적으로 표명하고 있었다.
TV 시리즈 <설국열차>는 열차와 열차의 지배자를 신격화하던 종교적 요소는 전반적으로 배제하는 대신, 열차 내부에서 계급체제가 어떻게 자리를 잡아가는지, 각 계급에 속한 이들이 어떻게 극한 대립과 반목을 지속하면서도 동시에 유기적으로 상호작용을 하게 되는지를 보다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래픽 노블부터 영화를 거쳐 TV 시리즈까지 <설국열차>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크게 두 가지라고 볼 수 있다. 첫째는 인류의 종말 위기이고, 둘째는 엄격한 계급질서이다.
사실 이 둘은 기독교적 인간 이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들이다. 전자는 요한계시록으로 대표되는 종말론적 세계관을 반영하고, 후자는 원죄로 인해 타락한 인류 전반의 현실에 대한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확증하고 있다.
앞서 <터미네이터> 시리즈에 대한 논평에서 언급한 것처럼, 기독교 문화에 바탕을 둔 미국의 영화와 TV 시리즈 가운데는 유독 인류 종말에 대한 서사를 선보이는 작품들이 많다. 이 작품들 속에서 종말이 일어나는 원인은 다양하다.
가장 많이 회자되는 것은 인공지능 로봇의 반란(<터미네이터>, <매트릭스> 등), 치명적인 바이러스 창궐(<나는 전설이다>, <워킹 데드>, <더 라스트 쉽> 등), 소행성 충돌(<아마겟돈>, <딥 임팩트> 등), 그리고 환경파괴와 급격한 기후변화(<투모로우>, <인터스텔라> 등)이다.
<설국열차>의 서사는 급격한 기후변화로 인한 인류종말 시나리오의 범주에 들어간다. 종말 서사를 담은 영화나 TV 시리즈 대부분은 일단 종말의 원인을 납득되게 설명해 주고, 인류가 사라져 가는 충격적 광경을 보여준 다음, 종말 앞에 선 인간 본성을 조명하는 데 집중한다.
독일의 실존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절박한 불안이 개개인의 고유한 삶의 의미를 밝혀준다고 주장한 바 있다.
유사한 맥락에서, 미디어 콘텐츠 속에 인류 종말 서사가 등장할 경우 거의 여지없이 그 종말 앞에 선 인류의 원초적 본성, 그 영혼에 아로새겨진 고유의 본성이 드러나게 된다.
여기서 폭로되는 인간 본성은 대부분의 경우 원죄의 속성을 가감없이 담아내는 저열한 욕망들이다.
일부 숭고한 영웅적 등장인물이 있어 이런 저열함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류의 고질적인 죄성이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종말의 상황은 항상 인간의 죄성이 초래하는 문제들을 극단적으로 악화시킬 뿐이다.
인류와 계급: 자원이 풍족해도 여전할 수밖에 없는 계급투쟁
창세기에는 아담과 여자가 원죄를 저지른 이후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노동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 사건에는 대단히 중대한 사회경제적 의미가 담겨 있는데, 바로 인간의 삶에 필요한 모든 자원이 자연적으로 충족되던 시기가 끝나고 본격적인 자원투쟁의 시대, 제로섬 경제 시대로 돌입했다는 점이다.
성경에서는 이를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는 말씀으로 대변하고 있다.
이로써 인류는 자연과의 투쟁뿐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무한한 투쟁마저 감내해야 하는 처지에 이르게 된다.
영국의 경험론자 토마스 홉스는 그의 저서 <리바이어던>(Leviathan)에서 이 기독교적 인간이해를 정치철학적으로 새롭게 진술한 바 있다. 그는 여기서 자연상태의 인간은 필연적으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황에 놓이게 된다는 유명한 이론을 제시했다.
이처럼 기독교적 관점으로 볼 때, 인류의 자원투쟁이라는 것은 현실의 인류가 종말에 이르기 전까지 결코 해결되지 않을 문제로 인식된다. 이는 현 인류의 영혼에 아로새겨진 불가피한 낙인이다.
<설국열차>의 서사 전체를 주도하는 기차 내부 계급체제라는 소재는 바로 이런 인류의 본성과 현실을 직접적으로 내보여주는 장치로 작용한다.
영화 속에서 생존한 인류의 숫자는 불과 3,000명 남짓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적은 인구 사이에서도 계급제는 존재한다. 그것도 이전보다 더 강화된 채로 존재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인구는 극단적으로 줄었지만, 그만큼 누릴 수 있는 자원도 한없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설국열차> 내부의 자원은 버려진 종족 취급을 받는 꼬리칸 사람들까지 먹여살릴 수 있을 정도는 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열차 내부 지배층은 그들이 처음에 무임승차했다는 이유로 함부로 굶기거나 죽이기 일쑤이고, 그들 중 소수만 일꾼과 기술자로 삼아 이용할 뿐이다. 한마디로 노예로 삼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오늘날 우리 인류 전체의 정치경제 현실에 대한 단적 메타포이다. 현재 인류 전체가 가진 생산력은 전 인류를 근근히 부양할 정도는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일 인류 전체가 미국과 서구 선진국 국민들 수준으로 풍족한 소비생활을 영위하고 높은 삶의 질을 유지하려면 현재의 생산력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가정 하에 세계 인구가 대략 15억명 수준(현재는 77억명)으로 줄어들어야 한다.
그러면 인류의 인구가 실제로 현재의 생산력을 유지한 채, 15억 수준으로 줄면 계급투쟁은 사라질까? 단언컨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풍족하게 나눠 쓸 자원이 넘쳐나는 상황이 되더라도 지배층과 비지배층, 압제하는 자와 억압받는 자 사이의 긴장과 갈등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를 주(主)의 자리로 높여 타인으로부터 받들어지려 하는 자기신격화 욕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창 3:5)", 이는 원죄로부터 발원한 죄성의 본질적인 속성이다.
자원의 소유와 분배를 통제하는 힘, 그것이 곧 권력의 본질이다. 미국 저명한 정치학자 해럴드 라스웰(Harold D. Lasswell, 1902-1978)은 자신의 저서 <정치학>(Politics)에서 정치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누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갖느냐(Who gets what, when, how)."
만일 모두에게 충분한 삶의 질을 누릴 만한 자원이 분배되면 분명 계급투쟁은 사라지거나 최소한 약화될 공산이 높다. 그런데 이러한 일은 인간 현실에서는 결코 벌어지지 않는다.
누군가는 결국 죄된 본성에 따라 타인을 지배하고 노예화하려는 욕망에 휩싸이고, 그리하여 모든 능력과 방법을 동원해 자원을 독점하는 소수가 등장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지배층은 비지배층에게 결코 풍족한 자원을 분배하지 않는다. 그래야 피지배층에 속한 이들이 지배층이 가진 자원에 의지하면서 자발적으로 굴복하기 때문이다. 권력은 이렇게 유지된다.
이 불평등의 사슬을 끊기 위해 많은 이들이 일생을 바치고 피를 흘려왔건만, 인류의 역사는 크게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어떠한 정치적 혁명과 변혁도 결과적으로 보면 지배층의 구성원과 겉모습만 바꾸는 수준에 머무를 뿐이었다.
이전에 나름 숭고하게 평등과 박애 정신을 가지고 봉기한 이들도 결국 혁명에 성공해 기득권층에 편입되면 기존의 지배층과 다를 바 없는 행태를 보이게 된다. 이는 어떠한 나라든, 혹은 어떠한 단체든 간에 피할 수 없었던 운명이다.
사실 이 계급투쟁의 지긋지긋한 사슬을 잠시라도 제대로 끊어낸 사례가 인류 역사 전체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극히 희귀할 뿐이다.
그 희귀한 사례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사도들이 직접 목회를 담당했던 초대 예루살렘 교회이다. 사도들은 순전한 신앙만이 원죄로부터 나오는 자기신격화 욕망을 분쇄하고 온전한 자원분배가 이루어지는 공동체 질서를 수립할 힘을 준다고 믿었고, 또 이를 실제로 실천한 바 있다. <계속>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