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전파 수단을 무력화하는 가상현실
◈가상과 현실: 두뇌와 컴퓨터 시스템의 직접 소통을 지향하는 VR 기술
1987년경 컴퓨터 과학자 자론 라니어(Jaron Lanier)가 현대적인 의미의 '가상현실' 개념을 본격 유행시키기 시작했을 때, 그의 심중에는 '탈기호적 소통(postsymbolic communication)'의 전망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탈기호적 소통'이란 현실에 대한 상징 혹은 기호인 언어에 의존하는 소통을 벗어나, 정보나 사상을 직접 감각에 각인시키는 방법으로 소통하는 것을 의미한다.
라니어가 자주 이 탈기호적 소통의 사례로 드는 것이 '집(house)'이라는 용어의 의미 전달이다. 집이라는 객체를 언어로 표현하고 전달한다면 그 실재성이 크게 저하된다.
언어는 현실을 지시하는 기호로서 의미 전달시 상당한 수준의 중의성 혹은 애매성을 내포하게 된다. 이를 극복하려면 언어 기호가 지시하는 객체, 즉 집을 구석구석 직접 체험하게 해주면 된다.
이러한 체험을 시각, 촉각, 후각, 청각을 통해 모방된 현실에서 얻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가상현실 기술이다. 쉽게 말해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는 성어를 기술적으로 실천하려는 셈이다.
아직 가상현실 기술은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많은 개발자, 연구자들이 가상현실의 감각적 실재성을 높이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
그들의 이상은 <토탈 리콜>, <매트릭스>, 그리고 <인셉션> 같은 SF 영화에서처럼 현실과 구별이 불가능한 가상현실을 구현하는 데 있다.
다소 급진적인 개발자들은 머리 속에 마이크로칩을 이식해 인간의 두뇌와 컴퓨터 시스템을 직접 연결하는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rain-Computer Interface, BCI)' 기술의 개발과 적용에 몰두하고 있다.
이 기술은 최근 전신마비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일부 촉각을 느끼게 해줄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
이런 추세라면, 향후 인간이 컴퓨터 시스템을 통해 정보를 얻고 업무를 수행하는 데서 가상현실 기술이 점차 지배적인 수단으로 자리잡게 될 공산이 크다.
컴퓨터 세상을 지배하는 주요 기술기업들이 숱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재원을 가상현실 기술에 쏟아붓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기술 발전의 맥락에서 '페이스북 호라이즌'의 서비스 개시는 상당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라 볼 수 있다.
원래 페이스북의 서비스 수단은 기본적으로 텍스트와 이미지이다. 이는 라니어를 비롯해서 가상현실 연구자들이 추구하는 탈기호적 소통에 비한다면 매우 구시대적인 방편이라 볼 수 있다.
페이스북은 자사의 서비스가 갖는 이 치명적 약점을 이번 가상현실 구축을 통해 극복하려 하고 있다. 페이스북의 시도가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둘지, 언제까지 이어질지 현재로서는 알기 어렵다. 가상현실 기술의 전반적 수준이 아직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페이스북이 가상현실 기술에 제법 혁신적인, 거의 특이점 수준의 비약이 이루어질 때까지 서비스를 유지하며 개선시킨다면, 향후 전개될 가상현실 헤게모니 경쟁에서 독점적 지위를 거머쥐는 승자가 될 수도 있다.
◈가상과 신앙: 복음 전파 수단을 원천적으로 무력화하는 VR 기술
가까운 미래에 가상현실 세계의 주도권을 페이스북이 가지게 될지, 구글이 가지게 될지, 아니면 새로운 IT 공룡이 등장해 가져가게 될지 현재로서는 알기 어렵다.
그렇지만 조금씩 본격화되고 있는 가상현실 세계의 도래가 기독교 신앙생활에 미칠 여파에 대해서는 여러 모로 개연적인 예상이 가능하다.
가상현실 기술이 추구하는 탈기호적 소통은 기독교 신앙 입장에서 기회보다 상당한 위협으로 다가올 것이 분명하다. 이는 탈기호적 소통이 성경에 의지하는 믿음을 철저하게 구시대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는 성경의 내용을 미신적이고 구시대적인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복음의 내용을 전하는 방식 자체를 구시대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뜻이다.
성경에 기록된 복음은 기본적으로 텍스트 기반, 기호 기반 메시지이다. 물론 복음에는 생생한 감각을 기반으로 하는 체험적 메시지 역시 풍성하게 담겨 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향후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들을 언어에 기반해서 전하고 있다.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존재한다. 우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당시 미디어 구현 수단이 텍스트와 이미지 외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그렇지만 보다 본질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복음을 '들음으로써' 믿기를 의도하셨던 바가 더 중요한 이유라고 볼 수 있다.
감각은 생생한 정보 전달에는 더없이 유리하지만, 아직 감각적으로 실현되지 않은 것들, 그 가운데서도 사람의 감각적 경험으로는 도저히 예견하기 어려운 형이상학적이고 초월적인 실재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런 일은 언어적이고 추상적인 논리를 통해 비로소 가능케 된다.
복음 안에는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이루는 다양한 개념들이 존재하고, 그 개념들을 그물망처럼 조화롭게 엮어내는 추상적 논리들이 숨어 있다.
이러한 내용들을 감각만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오로지 언어를 도구로 삼는 고도의 사유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성경 안에도 가상현실과 매우 흡사한 개념이 등장하는데, 바로 이상(異象) 체험이다. 다수의 선지자들, 사도들, 성도들이 이상을 봤고, 간략하게든 자세하게든 그 내용을 성경 안에 남겼다.
그렇지만 이상을 보는 체험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 데서 주된 방편으로 인정되지는 않았다. 만일 이상 체험이 하나님의 뜻을 인간에게 온전히 전할 수 있는 완벽한 방편이었다면, 하나님의 계시 행위 전체가 이상으로 이루어졌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인간이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요일 1:1)" 육체로 오셨지만, 정작 중요한 가르침 대부분은 감각이나 이상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전해주셨다는 점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이상 체험이 가장 많이 기록되어 있는 요한계시록 역시 이러한 면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요한이 종말 때 일어날 일들을 두려울만치 생생한 이상으로 목도하고 있지만, 그는 그 이상들이 전하는 의미의 상당부분을 알지 못한다.
요한이 이를 점차 깨달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보는 이상들에 대한 의미를 풀이해주던 여러 '말씀들' 때문이다.
이를 통해 탈기호적 소통만으로는 인간이 온전한 계시를 받아들이고 믿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가상현실 세계를 구축하려는 이들은 기호언어가 구축하는 언어적-추상적 논리를 구시대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순수하게 감각적인 체험만을 의미 생산과 전파의 주된 방편으로 내세운다.
이런 소통 방식은 쉽고, 간단하고, 편리하고, 자극적이다. 골치아픈 사유를 배제하고 그저 직감과 느낌에 몸을 맡기면 알아서 정보가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소통 방식에 길들여지고, 결국에는 기호언어에 의존하는 소통 방식과 그로부터 가능케 되는 추상적 사유를 경히 여기다 못해 배격하게 될 것이다.
이런 소통 행태가 지배적인 세상에서는 기존에 교회가 활용해 온 성경읽기, 설교, 기도의 가치가 무력화될 것이 자명하다.
성경 속 언어가 전하는 개념과 논리, 의도를 깊게 숙고해야만 신앙이 싹틀텐데, 이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원천적으로 차단된, 오로지 감각적 자극에만 길들여진 세대에게 과연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이 자라날 수 있을까?
이러한 전망에 의거해볼 때, 현재 페이스북 등 다국적 IT 공룡들이 주도하고 있는 가상현실 구축 전략은 기독교 선교와 교회 내 믿음의 성장이라는 과업을 원천적으로 가로막는 거대한 위협으로 다가온다.
그 위협의 정도가 얼마나 거대하냐면, 경험적 데이터를 신봉하는 과학주의 무신론이 교회에 가하는 위협이 우습게 여겨질 정도이다.
가상현실 세계로부터 정보를 습득하는데 길들여진 세대는 오로지 감각에만 담을 수 있는 정보, 그것도 메타버스 안에서 '메타적으로' 조작된 감각에 담을 수 있는 정보에만 가치를 두고 거기에만 의존하게 된다.
굳이 초월적인 것, 기독교적인 것, 성경적인 것에 대한 반감을 주입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을 거부하려는 삶의 방식에 익숙해지게 되는 것이다.
'페이스북 호라이즌' 같은 가상현실 서비스가 더 발전되고 일반화되는 현 상황을 보면서 '시대의 표적(마 16:3)'이 보다 뚜렷해짐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 신앙인들이 이런 시대의 흐름을 명확하게 분별하고, 스스로 믿는 믿음이 진정 '성경적'인지 재점검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미디어의 급진적이고 극단적인 발전상이 신앙생활에 미치는 여파를 냉철하게 판단할 수 있는 지식과 지혜가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인 것이다.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