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가족해체'는 단순히 관계나 구조의 분리만이 아니라 가족으로의 정체성이 공유되지 못한 상태, 정서적 유대와 결속, 자녀의 사회화 등과 같은 가족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는 상태를 포함한다. 이 개념을 북한가정에 대입시키면, 북한에서의 가족해체는 부분적 양상이 아닌 총체적이며 구조적인 문제다. 북한의 가족해체는 무엇으로부터 기인한 것인가. 크게 정치적, 경제적, 제도적 요인으로 나눌 수 있다.
정치적 요인의 가족해체
북한정권 초기인 1947년에 항일빨치산 출신 자녀들을 위해 세운 '만경대혁명유자녀학원'의 학생들로부터 김일성은 '아버지'라고 불려졌다. 죽은 빨치산 동지들의 자녀들이었기에 김일성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대체로 자연스럽다.
1949년부터 북한이 탁아소와 유치원을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그 원생들로부터도 김일성은 아버지로 불려졌다. 당시, 유치원(3-6세)의 수는 121개로 총 7,327명의 원생을 수용했다고 한다. 탁아소는 보건국 명령1호(1949년)에 따라 1세부터 3세까지 유아들을 국가적 및 사회적으로 키우는 공산주의적 보육교양기관으로 승인되었다.
이때부터, 북한은 전국적으로 국영탁아소를 세워나갔고 해당 유아들을 강제로 입소시켰다. 유아들을 한 달간 맡아보도록 하는 월 탁아소도 운영되었는데, 이는 북한에서 나타난 첫 번째 가족해체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탁아소에서의 교육은 유아들로 하여금 가족 구성원과의 정체성 공유 및 정서적 유대를 가로막았다.
맡겨진 유아들은 월령에 따라 젖먹이반, 젖떼기반, 밥먹이반으로 나뉘어져 양육되었는데, 말, 보행법, 노래, 유희뿐만 아니라 김일성을 따라 배우는 교양실이 설치되었고 배급체계를 통해 먹는 것, 입는 것 등 필요한 물품들 모두를 김일성이 공급해준다고 가르치며 김일성을 '친 어버이'로 따르게끔 교육시켰던 것이다.
김일성은 1962년 신년사에서 사회를 화목하고 단합된 하나의 대가정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대중들이 애국적 헌신성과 대중적 영웅주의를 발휘할 것을 강조했다. 이는 집단주의 정신을 통해 전체 인민을 단합된 하나의 대가정으로 만들고자 한 것이다. 국가라는 2차 집단을 가정이라는 1차 집단으로 전환하여 각 가정에서 육체적 생명을 준 부모들보다 김일성이 더 중요한 구심점이 되게 한 것이다.
'국가의 가정화'라는 기치아래, 어린이와 청소년들 대상으로 김일성에 대한 '효자동이' 경쟁을 부추겼다. 또한, 각 가정마다 벽면에 김일성 사진을 걸어놓게 하여 섬기게 함으로써, 김일성은 북한 전체가정에 '진정한 어버이'가 되었다.
1960년대에 처음으로 등장한 이 대가정론은 김일성 일인독재 체제를 구축하는데 있어서 핵심담론이 되었고 결국은, 1967년도 이르러 김일성의 일인독재 권력시스템이 작동되기 시작했다. 이때, 권력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김일성 가계 우상화가 본격화되기도 했다.
현재 북한을 통치하는 김정은 또한, 전체 인민들로부터 '어버이'로 불리고 있다. 30대 초반에 불과한 나이임에도 김정은의 대표적인 지도자상징이 '자애로운 어버이'이다. 2016년 창작된 혁명가요 <우리의 김정은 동지>에서는 김정은을 "천만을 안으신 어버이되여 온 나라 대가정 보살피시며 인민의 락원 빛내시는 분"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권력을 독점하고 유지하기 위한 기제로 시작된 '사회주의 대가정' 시스템은 가족해체를 구조화시켜버렸다.
경제적 요인의 가족해체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 건설 초기에 봉건적 가족제도의 타파와 여성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허용되었던 협의이혼제도를 1956년에 폐지한 후 재판이혼만 허용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이혼이 자유롭게 보장되지는 않았다.
이혼이 허용되는 몇 가지 경우가 있는데 첫째, 당사자가 엄중한 범죄행위를 하여 장기 징역형을 받았을 경우 둘째, 당사자가 장기적이며 만성적인 정신병으로 완치될 가능성이 없다고 의학적으로 판명될 경우, 셋째, 당사자가 2년 이상 행방불명되어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 없다고 인정되는 경우 넷째, 당사자가 부부의 신의를 심각하게 배반하여 사회적으로 큰 비난을 받는 경우 다섯째, 당사자가 결혼생활을 지속할 수 없는 신체상의 장애 또는 만성적 질병으로 배우자와 후대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 여섯째, 정당한 정치적 문제로 이혼 문제가 제기되었다고 인정되는 경우 등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고난의 행군 이후, 대규모 탈북 러시로 인해 북한의 가정들은 대부분 위의 세 번째와 다섯 번째 사유에 해당되어 이혼가정이 급증하게 되었다. 경제적 요인으로 인한 심각한 가족해체이다. 물론, 가장 큰 일차적 요인은 가족 구성원의 사망이다. 식량난으로 인해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한 이들이 300만 명에 육박한다는 추정이 있을 정도니 말이다. 가족원의 사망은 곧, 탈북으로 이어졌다.
▲김일성 동상 앞에서 절하는 북한 주민들. ⓒ지저스 아미 2014년 2월호 |
탈북여성들, 중국에서의 가족 재구성 악몽
심각한 경제난 후, 중국으로의 탈북행렬 중 여성들의 수가 압도적이었다. 그 이유는 매우 부정적 측면으로 중국의 변수 때문이다. 중국의 급속한 도시화와 지역간 발전의 불균등은 내부적으로 혼인시장의 불균형을 초래하게 되었다. 특히, 낙후된 동북지역은 중국 내에서도 여성비율이 가장 낮은 지역으로 성매매가 급증해왔다. 탈북 여성들은 이 같은 동북지역의 혼인시장 성비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이 된 셈이다. 그녀들은 동북지역의 농촌이나 빈곤 지역의 농민, 장애인, 무직자 등 중국 내에서 배우자를 구하기 어려운 남성들에게 팔려 간 것이다.
성매매로 팔려간 탈북여성들 대다수는 매우 비정상적인 결혼생활을 경험하게 된다. 어떤 여성들은 한 집안에서 두 명, 세 명의 남편(?)을 모신다. 시아버지, 시동생이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경우다. 아내가 아닌 접대부(성 노리게) 신세다. 많은 여성들이 철저한 감시와 더불어 폭력, 학대에 시달린다.
이들의 인권은 땅에 떨어졌다. 심각한 비인권적 상황에 직면함과 동시에 발각될 시, 강제 북송이라는 엄청난 심리적 압박으로 인해 깊은 정신적 트라우마에 빠져버린 상태다. 현재 중국에 거주하는 탈북여성들 중 거주기간이 십 년을 훌쩍 넘긴 이들이 적지 않고 최장기 이십 년이 넘는 이들도 있다. 중국에서 낳은 자녀들로 인해 그들의 발이 묶여버린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한국행, 또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꿈을 꾸고 있다.
결혼의 전통적 규범이 깨진 북한
김정은 정권 들어, 탈북자에 대한 강력한 단속으로 그 수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목숨 걸고 강을 넘는 자들이 있다. 그런데, 탈북하기 전에 이미 배우자와 헤어진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배우자가 직장문제로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거나 본인이 집을 나온 경우가 많아서 실제로 부부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떨어져 사는 기간이 길고 반복되다 보니 부부간의 친밀감이나 유대감이 형성되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배우자가 실종된 후, 2년이 지나면 이혼을 청구할 수 있는 제도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회령 같은 국경 지역은 한 집 건너 한집 꼴로 탈북하여 배우자가 없는 가족이 대부분이다. 또 다른 양상으로, 배우자가 탈북한 후 곧바로 재혼하는 경우다. 특히 남편들이 그렇다. 가족해체와 새로운 가족의 재구성이 쉽게 이루어진다. 이러한 현상의 근본적 원인은 바로 결혼에 대한 전통적 규범이 깨졌기 때문이다. 배급제가 붕괴된 후 혼인신고 없이 동거수준으로 부부관계를 유지하는 이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북한은 오늘도 정치적, 경제적, 제도적 문제로 야기된, 가족해체라는 고질적 병폐를 떠안고 있다. 다양한 형태의 가족 해체와 재구성으로 인해 수많은 사회적, 심리적 문제들이 야기되고 있으며 과거의 가족관계와 현재의 가족관계가 서로 얽히고 설켜 풀리지 않는 실타래가 되어 버렸다.
정교진
침례신학대학교 신학과(B.A)를 졸업하고 중국에서 북한선교(탈북자 사역)를 했다. 기독교한국침례회 국내선교회 북한선교부장을 역임했으며, 고려대학교 일반대학원 북한학과(Th.M, Ph.D)를 졸업했다. 고려대 북한통일연구센터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에 재직하고 있다.
* 이 글은 월간 「월드뷰」 5월호에 실린 것으로, 「월드뷰」와 저자의 동의 아래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