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욱주 교수님의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에서는 지난 주에 이어 박누리 감독의 영화 <돈>을 분석합니다. 영화 <돈>은 배우 류준열(조일현 역), 유지태(번호표 역), 조우진(한지철 역), 진선규(박창구 역), 김재영(전우성 역), 김민재(유민준 역), 정만식(변차장 역), 원진아(박시은 역) 등이 출연하며, 여의도 증권가의 주식 브로커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증권투자와 작전: 투기, 수탈, 사기, 그리고 몰락의 역사

한국은 서구에 비해 상당히 짧은 자본주의 역사, 증권투자 역사를 갖고 있다. 국내 최초로 상품선물 및 현물 거래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1896년의 일로, 인천에 '미두(쌀) 선물 취인소'가 개설되면서부터였다. 이어 일제강점기인 1920년에는 서울 을지로에 '경성 주식현물 취인소'가 설립되면서 본격적인 증권투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두 기관 모두 일제가 국내에 투기를 일으켜 조선인들의 자본을 착취하는 데 활용되었지만, 간혹 조선인 가운데 몇몇은 시세를 잘 읽어 벼락부자가 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인천의 미두왕 반복창(潘福昌)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일본인의 하인으로 일하다 19세에 500원(현시세 약 5천만원)을 들고 미두선물 시장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2년만인 21세에 40만원(현 시세 약 400억원)의 재산을 획득했다.

반복창은 번 돈을 조선 사교계에 뿌리고 다니면서 당시 인천 최고의 미녀로 불리던 김후동과 결혼해 유명세를 떨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성세는 겨우 2년간 지속되었을 뿐이다. 그의 나이 23세 때, 일제는 그를 비롯한 일부 조선인들의 성공을 시기해 미두선물 거래에 조직적인 방해공작을 펼쳤다. 이후 반복창은 번번이 미두선물 투자에 실패하였다.

사치와 투자 실패로 재산을 탕진한 그는 아내와도 이혼하고, 투자 실패의 충격에 빠져 중풍과 정신이상으로 고통을 겪다 불과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어느 나라든 증권투자의 역사는 곧 투기의 역사였다. 17세기 유럽에서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가장 먼저 실현했던 네덜란드(튤립 투기), 18세기 유럽의 떠오르는 경제대국이었던 영국(사우스 시 회사 투기), 19세기에 자본주의 신흥국으로 발돋움하고 20세기 이후로는 전 세계 자본주의 질서를 주도한 미국(철도회사 투기, 대공황, IT버블)까지, 증권시장의 역사는 가히 투기로 점철된 역사라 보아도 무방하다.

이 투기사건들은 유명한 격언들을 남겼다. 18세기 사우스 시 회사 투기에 휘말렸던 위대한 과학자 아이작 뉴턴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천체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지만, (주식에 투자하는) 사람들의 광기까지 계산할 수는 없다."

뉴턴은 사우스 시 회사 주식이 처음 급등할 당시 투자에 뛰어들어 큰 이익을 얻었으나, 주식을 판 후 시세가 한없이 올라가는 것을 바라보고 괴로워하다 최고점 근처에 전 재산을 투자해 가산을 탕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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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스 시 주식투기 사건 당시 아이작 뉴턴의 매매 시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선진국 각국의 증시에는 사업 성공 가능성이 높은 신생기업들에게 자본을 제공하는 순기능이 여전히 살아 있었다.

즉 투기는 증권투자의 불가피한 부작용이지만, 때로는 그런 투기 덕에 시장이 활성화되고 기업들이 활력을 얻는 순기능 역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애초 증권투자가 유망한 기업들에 자본을 조달하고 주주권을 획득하는 수단으로 도입되지 못했다. 그보다는 투기로 일반 투자자들의 자금을 수탈하는 식민통치 수단으로 도입되었고, 이로 인해 일반인들에게 매우 부정적인 인식만을 심어주게 되었다.

더구나 향촌 공동체 중심의 농경 노동과 소박한 삶을 강조해온 유교적 가치관까지 관여되면서, 증권투자는 일확천금을 노리는 노름의 일종으로 여겨져 천시되어 왔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증권업은 대졸 입사지망자들이 기피하는 직업군에 속했다. 일반인들 사이에 증권투자라는 행위가 매우 천박한 것으로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잊혀질 만하면 터지는 주가조작(작전) 사건, 투자사기 사건, 그리고 재계의 편법적인 증권시장 활용사례 역시 이런 부정적인 인식을 확고하게 하는 데 일조했다.

영화 <돈>에 묘사된 주가조작 사례는 증권시장에서는 수시로 일어나는 일이다. 최근 이슈가 된 청담동 주식부자 사기사건 같은 사례는 그 수를 헤아리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재계 역시 증권투자를 편법적으로 활용해 왔는데, 대표적 사례가 비상장계열사 출자전환, 순환출자고리, 그리고 일감 몰아주기를 활용한 편법 상속 의혹들이다.

이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 방식은 한국교회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국내 한 대형 장로교회는 이 비상장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 방식을 변용해 목회직 세습 전략으로 채택하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다소 나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국내에서는 증권투자가 한탕주의 투기 혹은 노름에 불과하다는 부정적 인식이 만연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적 관점으로 볼 때는 어떨까? 증권투자는 세간에서 바라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앙의 입장에서도 순전히 기피해야만 하는 행위인가?

명성

◈증권투자와 신앙: 성경적 관점에서 결코 낯설지 않은 증권투자

공산주의 사상의 창도자 마르크스는 증권투자를 '가공자본을 생성하는 행위'라고 불렀다. 왜 그는 증권이 가공자본이라고 말했을까?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존재한다.

한 유망한 회사가 상장심사를 통과해 기업공개(IPO)를 단행할 경우, 이 회사 주식의 상장가는 액면가와는 비교할 수 없을만치 부풀려진 채 책정되는 것이 증시의 일반적인 관행이다.

액면가 500원짜리 비상장주식의 경우 통상 상장가가 주당 10,000원(20배)에서 20,000원(40배)에 책정되곤 한다. 시장이 활황이거나 한창 투기장이 펼쳐지고 있는 경우, 액면가 대비 상장가가 100배 수준에 이르는 경우도 흔하게 목격되곤 한다.

이제 이 주식이 시장에 상장되면 해당 기업의 창업주들, 그리고 IPO에 참여한 증권사들과 재무적 투자자들이 최대 수혜자가 된다.

시장에 상장되자마자 투자금의 20-40배에 해당하는 수익을 거둘 수 있고, 때로는 상장 직후 주가가 계속 상승해 그보다 더한 수익도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이 상태를 기업의 실체가 이미 시장에 다 판매된 상태라고 보았다. 그의 관점으로 볼 때 상장시 이익을 보지 못하고 뒤늦게 이 기업의 주식을 매입하는 이들은 이미 실체가 다 빠져나간 허상을 사들이는 우를 범하는 셈이다.

마르크스에게 있어 증권이란 기업가치라는 허구적 명목을 부여한 종이조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여기에 부여되는 권리라고 해봐야 주총 의결권과 배당권인데, 주총 의결권의 경우 소액투자자들에게는 실질적으로 무의미한 권리이고, 배당권 역시 기업이 수익을 내지 못하거나 배당결의를 하지 않으면 단지 명목상의 권리로 전락하고 만다.

여기에 더해, 실제 노동을 통해 기업이 소유한 생산수단을 운용하는 노동자들, 직원들의 경우에는 헐값의 임금을 받을 뿐 주주의 지위로부터는 완벽하게 배제된다. 그들이 주주가 되려면 별도의 자금으로 자기 회사의 증권을 매입해야만 한다.

이는 마르크스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처사였다. 그는 실제 생산수단을 운영하고 노동을 감내하는 이들만이 그 생산수단을 소유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돈 마르크스
▲공산주의 사상의 창도자 마르크스는 증권투자가 지극히 주술적이고 기만적인 행위라고 비판했다.

이로써 마르크스는 증권투자가 기업가치라는 명목을 앞세운 허상, 가상에다가 자본이 갖는 생명력을 불어넣는 주술적이고 기만적인 행위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물론을 추종했고, 물질적 실재가 뒷받침되지 않는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증권투자는 역사의 여러 사례들이 보여준 것처럼, 그리고 마르크스가 주장한 것처럼 순전히 사기행각에 동참하는 것 또는 사기를 당하는 것에 불과한가?

우선 성경적 관점으로 볼 때, 기업가치와 같이 관념적인 권리를 실재적인 것으로 믿고 매매하는 행위는 충분히 허용될 수 있다.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팔아넘긴 장자권의 사례(창 25:29-34)가 대표적이다.

야곱과 달리 에서는 마르크스처럼 장자권을 순전히 말뿐인 것, 허구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그 결과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온전한 축복을 받아내지 못하는 불행한 처지로 전락했다.

결국 성경의 권리 개념대로라면 주주권, 기업 소유권, 의결권과 배당권, 이 모든 것은 일차적으로는 관념적인 것이지만 분명한 미래적 실효성을 가졌고, 따라서 증권은 마르크스가 말한 것과 같이 가공자본이 아니라 실물자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성경 내에서 기업 지분이란 개념도 사실 그리 낯설지만은 않은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 중 베드로와 야고보-요한은 오늘날로 따지자면 비등한 지분을 가진 유한책임 어업회사의 주주들이었다. 이 회사는 경영상 큰 성공을 거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께서 대제사장의 집에 잡혀가던 밤을 묘사한 성경의 기사는 요한이 대제사장과 서로 아는 사이였다는 사실을 명기한다(요 18:15). 이를 두고 많은 신약학자들은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이 동업한 회사가 대제사장을 비롯한 예루살렘 유력자들의 가문에 생선을 납품할 만큼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는 추론을 제시해 왔다.

실제 투자의 역사 가운데서도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증권투자로 큰 성공을 거둔 이들이 존재한다. 템플턴 펀드의 존 템플턴이 대표적이다.

그는 투자기업을 고르는 데 있어 영업이익률 외에도 특별히 경영의 투명성과 도덕성 등을 중시했고, 거듭된 투자 성공 끝에 거대 펀드회사를 이룬 후 종교계의 위대한 인물들을 기리는 종교계의 노벨상, 템플턴상을 제정했다.

돈 템플턴
▲신화적 성공을 거둔 템플턴 펀드의 창업자 존 템플턴.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을 제정한 인물이다.

물론 현실에서, 특히 대한민국 증권투자 현실에서 포착되는 시세차익 기회의 상당 부분은 작전세력 혹은 투자사기세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도의적 차원을 떠나 현실적 차원에서도 투자자들에게 큰 부담을 준다. 작전과 투기를 뒤쫓다가 재산상 막대한 손실을 보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원론적 차원이긴 하지만 공시 의무, 사기사례의 철저한 방지, 공직자 및 내부자 거래금지라는 감시감독 원칙들이 지켜져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증시는 돈에 대한, 재물에 대한 인간의 탐욕으로 움직이는 곳이다. 따라서 증시가 존재하는 한, 증권투자 활동이 존재하는 한, 불법적이고 사기적인 작전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권투자는 일단 자본주의 체제가 인정하는 합법적 투자행위로서, 여타의 투자 분야에 비해 상대적으로 투명하고 치밀한 감시와 감독 아래 관리되고 있다.

게다가 성경적으로 위배될 것이 없는 권리 개념을 포용하고 있고, 유망한 신생기업들에 자본을 제공하는 순기능 또한 갖고 있다.

따라서 스스로가 작전세력 노릇을 하거나 투자사기를 기획하지 않는 한, 기독교인 입장에서 증권투자에 참여하고 그 이익으로 헌금을 한다 하여 신앙양심에 거리낄 것은 없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구약성경에 규정된 '헌금할 수 없는 수입(도적질, 사기, 매춘 등 부도덕한 행위를 통해 번 돈, 신 23:18)'에, 증권투자로 얻은 이익은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부도덕한 수입으로 헌금하는 것이 금지된 이유는 이 돈의 부정함 여부를 떠나, 이 돈을 벌어들인 방식 자체가 이미 영혼을 구원에서 멀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증권투자는 기본적으로 현대 자본주의 문명 안에서 합법적으로 보장된 행위이며, 성경적 차원에서도 크게 문제시되지 않는 일이다.

다만 보물선 사건과 같이 일확천금을 보장하는 사기성이 명확한 건에는 투자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런 행태는 사기에 동조하는 꼴이 될 뿐 아니라, 결국은 투자자 자신의 재산도 지키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탐욕에 자신의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수준에서, 사기와 불법행위에 동참하지 않는다는 확실한 인식 하에서 기독교인의 증권투자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다만 영화 <돈>에 묘사된 바와 같이 의심스럽고 불법적인 성격이 다분해 보이는 투자기회는 기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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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에 지배된 채 이행하는 투자는 신앙의 양심에도 위배될 뿐 아니라, 자신의 재산을 지키는 데도 도움을 주지 못한다.

이는 기독교인으로서의 신앙양심 때문이기도 하고, 실제로 사기-불법성이 짙은, 작전성이 짙은 건수에 투자해서 재산을 증식한 사례를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는 현실적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작전의 기미가 확연하다는 매혹적인 이야기가 나올 때는 이미 늦은 시점임을 기억하자. 스마트 머니(smart money)는 주식을 현금화하는 중일 것이며, 정보 비대칭의 덫에 갇힌 일반투자자들만 고가에 그 주식들을 매입하고 있을 것이다.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