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안 되는 일이 없어요. 그것을 보고 있습니다.”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는 성경의 말씀처럼 어느덧 97세의 백발이 됐지만, 그 나이도, 그리고 불편한 몸도 박재훈 목사(캐나다 토론토 큰빛장로교회 원로목사)의 신앙과 창작에 대한 열정을 막을 순 없었다.
캐나다로 떠나기 전 본지와 인터뷰를 가진 박 목사는 고령의 나이로 한국에서 여러 일정을 소화했음에도 불구하고 밝은 표정으로 기자를 맞았다. 박 목사는 2005년 갑상선암과 전립선암 판정을 받았고, 협심증과 당뇨합병증 등으로 오랫동안 투병해 왔다. 이제 몸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휠체어를 타야 하고 목소리도 잘 낼 수 없지만, 명확하게 힘주어 말하는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엔 힘이 실렸다.
한국교회 제1호 지휘자인 박 목사는 해방 후 음악의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찬송가와 성가곡, 어린이 동요 1,500여 곡을 작곡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머님의 은혜’ ‘펄펄 눈이 옵니다’ ‘산골짝의 다람쥐’ ‘송이송이 눈꽃 송이’ 등 우리에게 익숙한 많은 곡이 다름 아닌 그의 작품이다. 또 그는 제6회 대한민국오페라대상에서 창작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최근 한국에서 오페라 <함성 1919>를 선보였다. 40여 년의 염원이 성취되는 순간이었다.
“다 하나님께서 하신 거니까 그저 너무 감사하죠. 1973년 미국으로 공부하러 가고 10년이면 다 끝날 줄 알았는데, 오페라 대사가 안 들어와서 40년이 걸렸네요. 그동안에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평양의 요한학교, 도쿄 제국고등학교, 미국 웨스트민스터대 합창대학 등을 거쳐 한양대 음악대학 교수를 역임하던 박 목사는 1972년 오페라 ‘에스더’를 선보였다. 그것을 본 사무엘 마펫 선교사는 박 목사에게 3.1운동을 주제로 오페라를 제작할 것을 제안했고, 박 목사는 공부를 위해 1973년 다시 미국으로 유학 길에 올랐다. 그리고 1979년 캐나다로 건너간 그는 나이 60이 되어 목사를 안수를 받았다.
“하나님께서 저를 훈련시키신 거예요. 영락교회 지휘자로 있을 때 저는 본래 음악인이니까 하나님께 찬양 드릴 때 교인들 중에 바르지 않은 태도로 찬양을 드리면 ‘나가라’고 그랬는데 목사가 되고 교회를 개척하니 다섯 가정인 거예요. 여기서 누구한테 ‘나가라’고 하면 아무것도 안되잖아요. 하나님께서 제게 ‘내쫓으면 안 된다’고 ‘품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다 집사인데 예수님에 대해 잘 모르고 찬송가도 모르고, 저는 예배 때 하나님께 찬양할 찬양대가 있어야 하니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다가 설교하다…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영락교회에서는 명령했는데, 여기에 와서 제가 밑바닥으로 떨어졌죠. 섬기게 하셨어요.”
현재 큰빛장로교회는 캐다나 토론토의 최대 한인교회로 불리지만, 그가 목사가 되고 교회를 처음 개척할 당시에는 어른이 10명 남짓이었다고 한다. 이후 2대 담임이 된 임현수 목사와 함께 큰빛장로교회가 성장하고 오페라 대사가 들어오기까지 여러 일화들을 회상한 박 목사는 결국 모든 것이 ‘하나님의 훈련’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동안 (큰빛장로교회교회가) 한 3,000명 됐어요. 거기서 3,000명은 한국에서 3만 명이지요. 하나님은 참 묘하십니다. 보통이 아니세요. 이처럼 3.1운동 때도 온 국민의 1%만 기독교인이었어요. 그 기독교인이 국민과 하나가 되어 99%를 끌고 나갔습니다. 당시 20만 명이던 교인이 100년 동안에 1,200만 명이 됐어요. 60배가 늘어난 겁니다. 그런데 장사꾼이 교회에 들어왔어요. 교회의 본질을 없애고 사회 조직을 만들고 비즈니스를 하고 말이죠. 그래서 누가 ‘교회는 없어질 것’이라고 말하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승리하실 겁니다. 세계 200여 나라 가운데 한국 선교사가 안 간 데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라고 하셨듯, 교회는 그리스도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게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이걸 보십니다. 세계 둘째 가는 큰 선교의 나라에요. 이제 통일이 되면 평양까지 선교사가 쭉 갈 겁니다.”
끝으로 그는 오페라 <함성 1919>의 작업과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청년들에 대한 메시지를 전했다. <함성 1919>는 대사를 써줄 사람이 생긴 후 2013년부터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해 올해 초까지 작업을 진행했다고 한다.
“<함성 1919>는 제가 한국교회가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썼습니다. 공연이 이틀 동안 열렸는데, 이제 씨가 뿌려진 거고, 크고 열매를 맺기까지 참고 기도해야지요.
이 시대 청년들이 애를 쓰고 고생하고 있는데요. 다 대학 출신인데 직업도 없고 비극입니다. 그렇지만 이건 잠깐 있는 고난, 시련의 시간이에요. 신앙을 가진 청년들에게 말할 수 없는 시련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않아요. 시련을 참고 이기면 끝까지 참는 자를 하나님께서 건져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붙드시지요. 그런 믿음을 가지고 살고, 하나님의 때가 올 때까지 이겨나갔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선 진리이자 생명이시니까요. 지금은 좀 어렵지만 죽지 않습니다. 참고 인내하고 나가면 승리할 날이 올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