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틀랜타에서 1시간 30분 가량 남쪽에 위치한 라그랜지 어드밴트루터란교회 박민찬 담임목사가 미국에서 단독목회 25주년을 맞았다. ‘하나님께 아이를 바치겠다’ 부모님의 서원으로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운명(?)’으로 목사가 된 뒤 다른 길은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최선을 다해 달려온 그에게 처음으로 4개월간 안식년을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안식년을 갖기 위해 한국을 방문할 예정인 박민찬 목사를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던 1월의 어느날, 교회에서 만나 인터뷰를 가졌다.
“25년간 한번도 강단을 놓치지 않고 말씀 들고 설교할 수 있게 해주셨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필라델피아에서 2-3년 공부 마치면 한국으로 돌아가 목회하리라 결심하고 떠난 유학길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비숍의 손에 이끌려 1993년 뉴욕 플러싱에서 개척한 교회에서 그리고 애틀랜타에서 총 16년 동안 이민교회를 섬기고, 9년간 여기 라그랜지에서 미국교회 백인들을 섬기며 선물 같은 시간을 누리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내가 계획한다면 이렇게 됐을까?’ 싶어요.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게 목회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오직 은혜라는 고백 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30대 초반, 크고 작은 한인 교회들이 즐비한 플러싱에서 멋 모르고 부딪혀 가며 한 사람씩 전도해서 교회를 세워가며 ‘사람’ 때문에 힘들고 고됐지만 그래도 적절한 시기에 딱 맞게 디모데와 디도같은 ‘사람’을 붙여 주셔서 위기를 뚫고 나갈 수 있었다. 한참 재미있게 목회하다 모든 걸 내려 놓고 애틀랜타로 내려와 다시 이민교회를 개척했다. 교회를 빌려준 백인 교회 성도들과 협력해 ESL을 비롯한 다양한 수업을 제공하며 성도들이 하나 둘 늘어 안정될 즈음, 말도 못할 아픔과 오해를 받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도 한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루터교단을 알리기 위한 노력과 목회자 양성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오히려 미국 교단(ELCA) 내 소수인종 목회자로서 자신의 역할과 사명을 다시 한번 깊이 고민하게 됐다고. 현재 백인 성도들을 섬기며 좀 편하게 갈 수도 있는데, 다시금 ‘광야의 외치는 소리’를 자처하고 있다.
“이민교회 16년을 160년처럼 섬겼어요. 우리 집 전등은 못갈아도 남의 집 전등은 갈아준다고, 목회는 50%도 안되고나머지는 성도들 소셜 워커로, 대변인으로, 때로는 운전기사 노릇까지 해가며 섬기는게 이민교회 목회자였으니까요. 이민국을 몇번이나 드나들었는지 몰라요. 한번도 성도가 부탁해 왔을 때 거절해 본 적이 없어요. 아이들도 교회 살다시피 하는 아빠 얼굴 보려면 교회로 찾아오곤 했죠. 다시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아요(웃음). 16년 동안 일년에 2-3번은 정말 그만두고 한국에 돌아가고 싶단 생각을 했어요. 교인들로부터 오는 상처, 95% 이상 백인 위주의 교단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하는 차별아닌 차별과 은근한 견제….이렇게 견딘 16년이 있어기 때문에 기대치도 않고 예상치도 못한 곳을 준비해 주신게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 교회에서는 설교하는 일, 가르치는 일, 카운셀링 외에는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목회자가 다른 어떤 것도 신경쓰지 않고, 자신들을 영적으로 살뜰히 돌봐주기만 바라죠. 겉으로는 평안하고 안정적이지만 영적인 싸움은 한인 목회할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합니다.”
한인 교회에서는 외적 환경의 어려움 속에서도 성도들의 영적 성장과 성숙을 위해 싸웠다면, 미국 교회에서는 죄에 대한 무감각과 싸우고 있다고 했다. 그가 속한 루터교단 ELCA를 비롯해 미국 내 대부분의 백인교회들이 동성애를 인정하며, 이혼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드밴트교회에 부임하고 얼마 안돼 이혼문제를 들고 나와 ‘성경에서 말하는 대로 최소한 죄라는 것은 알고 있으라’고 설교했다 집단적인 반발을 맛봤다. 평생 교회를 섬기는 성도들조차 초혼으로 결혼 생활을 지속하는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고, 많게는 일곱 번까지 이혼한 경우도 있을 정도로 결혼과 이혼은 그저 상황에 따른 선택일 뿐이지 그 안에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거룩함은 사라진지 오래다. 더 심각한 것은 동성애 문제로 가족 중에도 있지만, 한 다리만 건너도 동성애자가 있을 정도로 삶 깊숙히 편만하게 엄청난 물결로 들어와 있다. 중산층과 지식층이 더하고 교회라고 예외는 아니다.
“얼마 전에도 동성애의 죄악됨에 대해 설교했다 몇 성도들이 문제삼아 노회 카운셀 최고위원회까지 올라갔어요. 그럼 그만둘테니 당신들이 원하는 목회자 청빙하라고 하니, 교회를 30년 가까이 지켜온 터줏대감 같은 두 가정이 제가 나가면 같이 나가겠다고 해서 일단락 되긴 했지만 언젠가 또 터져나올 문제입니다. 더 무서운건 뭔줄 아세요? 제가 가는 곳, 만나는 사람들마다 집요하게 절 설득하려고 한다는 거에요. 심방 가면 자녀가 동성애자가 된건 죄가 아니라고 저를 설득하고, 굉장히 논리적으로 항변도 하고, 반 협박도 해요. 그럼 또 저는 성경말씀 찾아가면서 왜 이것이 죄인가 더 끈질기게 이야기하죠. 겉으로는 매너있고 웃는데, 영적 싸움이 치열해요.”
박민찬 목사는 미국 교회에서 온전히 목회만 할 수 있는 선물같은 환경이 주어졌는데, 성경대로 제대로 전하지 않으면 나중에 더 큰 매를 맞을 것이라는 두려움은 오히려 더 커졌다고 한다. 여기에 ‘25년 짬밥(?)’도 한 몫하는 듯하다. 교단 내 한인 목회자가 한 명도 없을 때 시작해 버텨온 맷집에,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언제든 물러날 수 있다는 배수진 친 심정으로 마지막까지 잠든 성도들을 깨우려는 목자로서의 사랑이, 점점 세지는 말씀의 강도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니 반발이 있어도, 듣기 싫어해도 광야의 외치는 소리가 되어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하시고 하시는 말씀을 최선을 다해 전하고 있다.
한국교회에 대한 애타는 심정도 전했다.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그것도 한인 교회가 아닌 미국 교회를 섬기다보니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 있는 그는 ‘차라리 한국이 조금 못살았으면 좋겠다’는 말로 순수성을 잃고 물질주의와 불합리성이 시스템화 되버린 교회의 현실에 한탄했다. 한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부르는 교회는 없어도 문을 두드려 열어주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간다. 교회가 내리막 길을 간다고, 잠들어 있다고 안타까워만 할 것이 아니라 그가 평생을 붙잡고 따라온 마틴 루터와 같이 개혁적인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다시 한번 나타나 희생의 피를 뿌리고 영적인 회복운동인 나라 전체적으로 일어나길 바라는 간절한 발걸음이 아닐까.
“우디 알렌이라는 코메디언이 ‘하나님을 웃게 만들려면 너희의 계획들을 하나님께 말하라’는 말을 했죠. 지난 25년간 제가 하고 싶다고 목회한 것도 아니고, 되고 싶다고 목회자 된 것도 아니고, 섬기고 싶다고 섬겨온 교회가 아니라 모든 게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 이뤄진 것이기에 내일 당장 그만두라고 하셔도 순종하는 마음으로 허락하신 때까지 주어진 사명에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신앙의 연수가 길어지고 목회의 경험이 쌓일 수록 ‘예수님 한 분 만으로 살아야 겠다’는 본질 이외에는 다 희미해져갑니다. ‘달걀에 바위치기’라도 해야 할일을 하면서 제 손 붙잡고 눈물 흘리는 성도들에 대한 책임에 최선을 다하는 목사로 남고 싶습니다.”
하나님 섭리 안에서,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시대 가운데 과연 신앙인이 자리가 무엇인가 가슴 속 깊이 묵직한 질문을 안고 인터뷰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