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통 오순절주의와 방언
전통 오순절주의에서는 방언이 성령세례를 받을 때의 표적일 뿐만 아니라, 더욱 최초의 증거로서 나타난다고 강조한다.
미국 하나님의성회 신조 제 8조에는 ‘성령세례의 증거’에 대한 항목이 있다. “믿는 자들에게 임하는 성령세례는 하나님의 영이 주시는 대로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최초의 외적 표적(the initial physical sign)에 의하여 증거된다(행 2:4). 이 경우의 방언을 말하는 것은 그 본질에 있어서 은사로서의 방언과 동일하다(고전 12:4-10,28). 그러나 그 목적과 용도에 있어서는 서로 다르다”고 언급되어 있다.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헌법에도, “신자들이 받은 바 성령세례의 증거는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방언이 그 최초의 외적 표적으로 나타난다(행 2:4). 이 방언은 본질상 방언의 은사와 같으나(고전 12:4-10,28), 그 목적과 사용에 있어서는 다르다”고 되어 있다.
더필드(Guy P. Duffield)와 크리브(Nathaniel M. Van Cleave)는 만일 성령의 모든 다른 사역과 구별될 수 있는 성령세례의 독특한 초자연적인 증거가 없다면 이 체험에 대하여 어떻게 확신을 느낄 수 있겠느냐고 질문하면서, 성령세례를 받은 최초의 증거는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오순절주의자인 변종호도, “오순절의 성령의 역사(力賜)로서 나타난 제 1은사가 방언이매, 오순절 역사라면 방언이 반듯이 앞섬을 내용으로 한다”고 하였고, 오순절주의 신학자인 박정렬은 신자에게 주어진 성령세례의 증거는 하나님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최초의 외형적 표적으로 증거된다고 했다(행 2:4). 그리고 이 경우에 있어서 방언의 말함은 본질상 방언의 은사와 같으나(고전 12:4-10, 28), 그 목적과 사용에 있어서는 다르다고 하였다.
성령세례의 체험을 추구함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점에 대해 거스(RoHollis Gause)는 지적하기를, 행위적인 조작이나 모방하는 것에 의해서 방언을 한다거나 예언 또는 황홀감에 몰입되는 것과 같은 체험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 것은 인간적으로 충동된 것이지 하나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을 말하는 것은 학습된 반응이 아니며, 또한 연습으로 되는 반응도 아니며, 그리고 사람에 의해 주장되는 반응도 아니라고 하였다.
역시 오순절주의자인 윌리암스(J. Rodman Williams)는 방언의 발성 현상에 대해서 자세히 기술하면서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에 있어서 방언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한다. 즉, 방언은 신자들의 삶에 있어서의 놀랍고도 새로운 어떤 것에 대한 하나의 특별한 표적이다. 방언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말 속에서 어떤 기적의 증거들을 갖게 된다.
방언하는 자들이 방언을 창제한 것이 아니었다. 도리어 모든 방언의 독특성 속에는 이렇게 방언하는 것이 하나님의 끊임없는 임재하심과 당신의 능력, 그리고 하나님이 특별히 인간사에 간섭하시는 표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방언은 ‘하나님 나라에 접근하는 능력’으로 제시되기까지 한다. 우리가 현재의 육신 안에 거하는 한,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하나님께 드리는 말씀인 방언보다 더 직접적인 하나님과의 교통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조용기의 성령세례 이해
국내에서 전통 오순절주의 성령세례론을 주장하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조용기를 들 수 있다. 그는 중생과 성령세례는 분명히 다른 별개의 체험이라고 전제하였다. 중생과 성령세례의 체험은 시기적으로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고, 또 어떤 기간을 두고 분명히 체험할 수 있는 별개의 체험으로 나타나기도 한다고 했다.
그러면 중생과 성령세례의 내용은 어떻게 다른가? “중생은 성령과 말씀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고 새생명을 받아들이는 체험입니다. 성령세례는 하나님의 사역을 행함에 있어서 놀라운 봉사적 권능을 얻기 위하여 성도들이 반드시 체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과 교회가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생의 체험 위에 성령세례의 체험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는 물로 세례를 받을 때에 성령세례를 받는다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지적한다. 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중생하여 하나님의 자녀된 증거로써 성령이 그 마음 속에 와 계신 것이지 성령세례를 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성령의 감화 감동을 받아서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면 성령이 우리 속에 임재하지만 그것이 성령충만은 아니라고 역설하였다.
무엇보다도 성령세례를 받게 되면 하나님의 존재와 구원의 확신이 분명하게 다가오게 되므로, 구원의 확신을 갖기 위해서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믿을 때 이미 성령을 받았다는 어리석고 나약한 자기 무능력에 빠진 변명을 단호히 버리고,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고 또 명령하고 있는 성령의 충만한 세례를 받아야만 한다”고 하면서, 이 성령세례는 주의 종에게는 능력있는 목회사역을 위해서, 평신도에게는 신앙생활의 승리와 성공을 위해서 모든 성도가 꼭 받아야 하는 체험일 뿐 아니라, 예수님의 명령이기도 하다고 강조하였다(행 1:8).
성령세례를 받을 때는 명확한 체험으로 받아야 한다고 조용기는 강조한다; “중생의 체험이 부인할 수 없는 인생 최대의 사건이듯이, 성령세례의 체험도 받았는지 모르는 희미한 체험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 어떻게 받았는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체험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는 믿되 성령세례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모르는 자는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성령을 받은 것도 같고 안 받은 것도 같은 상태에서는 끊임없이 정신적 투쟁을 계속하게 되기 때문에 담대한 복음 증거자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체험을 전하되 ‘너희 보고 듣는 이것’으로 명확한 체험으로 전해야만 하겠다고 역설하였다. 조용기는 그러면 이제 ‘내가 성령세례를 받을 때 어떤 증거가 나타나느냐’는 문제가 당연한 논란의 여지가 있게 될 것인데, 이 문제의 해답을 위해서는 성경 자체로 돌아가야 한다고 보면서 그 나타나는 증거들에 대해서 말했다.
조용기는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계속 성령충만한 상태가 유지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기에 성령세례를 받은 이후에는 성령충만을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해야 하며, 이를 위해 날마다 성령과 인격적인 교제를 해야 할 것을 중시하였다. 그래서 능력으로서의 성령의 은사와 인격으로서의 성령의 열매가 확실하게 나타나게 해야 한다.
성령충만이란 곧 예수 충만으로서, 외적으로는 능력있는 삶을 살아가야 할 뿐 아니라 내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필자는 한국교회 성령운동사에 있어서 조용기의 성령론이 지닌 큰 중요성이 있다고 보는데, 다음의 내용에서는 1960년대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의 저작 속에 나타난 성령론의 변화와 발전을 고찰할 것이다.
필자의 영성상담 홈페이지 http://bay.pe.kr
배본철 교수(성결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장)
전통 오순절주의에서는 방언이 성령세례를 받을 때의 표적일 뿐만 아니라, 더욱 최초의 증거로서 나타난다고 강조한다.
미국 하나님의성회 신조 제 8조에는 ‘성령세례의 증거’에 대한 항목이 있다. “믿는 자들에게 임하는 성령세례는 하나님의 영이 주시는 대로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최초의 외적 표적(the initial physical sign)에 의하여 증거된다(행 2:4). 이 경우의 방언을 말하는 것은 그 본질에 있어서 은사로서의 방언과 동일하다(고전 12:4-10,28). 그러나 그 목적과 용도에 있어서는 서로 다르다”고 언급되어 있다.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헌법에도, “신자들이 받은 바 성령세례의 증거는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방언이 그 최초의 외적 표적으로 나타난다(행 2:4). 이 방언은 본질상 방언의 은사와 같으나(고전 12:4-10,28), 그 목적과 사용에 있어서는 다르다”고 되어 있다.
더필드(Guy P. Duffield)와 크리브(Nathaniel M. Van Cleave)는 만일 성령의 모든 다른 사역과 구별될 수 있는 성령세례의 독특한 초자연적인 증거가 없다면 이 체험에 대하여 어떻게 확신을 느낄 수 있겠느냐고 질문하면서, 성령세례를 받은 최초의 증거는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오순절주의자인 변종호도, “오순절의 성령의 역사(力賜)로서 나타난 제 1은사가 방언이매, 오순절 역사라면 방언이 반듯이 앞섬을 내용으로 한다”고 하였고, 오순절주의 신학자인 박정렬은 신자에게 주어진 성령세례의 증거는 하나님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최초의 외형적 표적으로 증거된다고 했다(행 2:4). 그리고 이 경우에 있어서 방언의 말함은 본질상 방언의 은사와 같으나(고전 12:4-10, 28), 그 목적과 사용에 있어서는 다르다고 하였다.
성령세례의 체험을 추구함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점에 대해 거스(RoHollis Gause)는 지적하기를, 행위적인 조작이나 모방하는 것에 의해서 방언을 한다거나 예언 또는 황홀감에 몰입되는 것과 같은 체험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 것은 인간적으로 충동된 것이지 하나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을 말하는 것은 학습된 반응이 아니며, 또한 연습으로 되는 반응도 아니며, 그리고 사람에 의해 주장되는 반응도 아니라고 하였다.
역시 오순절주의자인 윌리암스(J. Rodman Williams)는 방언의 발성 현상에 대해서 자세히 기술하면서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에 있어서 방언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한다. 즉, 방언은 신자들의 삶에 있어서의 놀랍고도 새로운 어떤 것에 대한 하나의 특별한 표적이다. 방언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말 속에서 어떤 기적의 증거들을 갖게 된다.
방언하는 자들이 방언을 창제한 것이 아니었다. 도리어 모든 방언의 독특성 속에는 이렇게 방언하는 것이 하나님의 끊임없는 임재하심과 당신의 능력, 그리고 하나님이 특별히 인간사에 간섭하시는 표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방언은 ‘하나님 나라에 접근하는 능력’으로 제시되기까지 한다. 우리가 현재의 육신 안에 거하는 한,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하나님께 드리는 말씀인 방언보다 더 직접적인 하나님과의 교통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조용기의 성령세례 이해
국내에서 전통 오순절주의 성령세례론을 주장하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조용기를 들 수 있다. 그는 중생과 성령세례는 분명히 다른 별개의 체험이라고 전제하였다. 중생과 성령세례의 체험은 시기적으로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고, 또 어떤 기간을 두고 분명히 체험할 수 있는 별개의 체험으로 나타나기도 한다고 했다.
그러면 중생과 성령세례의 내용은 어떻게 다른가? “중생은 성령과 말씀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고 새생명을 받아들이는 체험입니다. 성령세례는 하나님의 사역을 행함에 있어서 놀라운 봉사적 권능을 얻기 위하여 성도들이 반드시 체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과 교회가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생의 체험 위에 성령세례의 체험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는 물로 세례를 받을 때에 성령세례를 받는다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지적한다. 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중생하여 하나님의 자녀된 증거로써 성령이 그 마음 속에 와 계신 것이지 성령세례를 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성령의 감화 감동을 받아서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면 성령이 우리 속에 임재하지만 그것이 성령충만은 아니라고 역설하였다.
무엇보다도 성령세례를 받게 되면 하나님의 존재와 구원의 확신이 분명하게 다가오게 되므로, 구원의 확신을 갖기 위해서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믿을 때 이미 성령을 받았다는 어리석고 나약한 자기 무능력에 빠진 변명을 단호히 버리고,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고 또 명령하고 있는 성령의 충만한 세례를 받아야만 한다”고 하면서, 이 성령세례는 주의 종에게는 능력있는 목회사역을 위해서, 평신도에게는 신앙생활의 승리와 성공을 위해서 모든 성도가 꼭 받아야 하는 체험일 뿐 아니라, 예수님의 명령이기도 하다고 강조하였다(행 1:8).
성령세례를 받을 때는 명확한 체험으로 받아야 한다고 조용기는 강조한다; “중생의 체험이 부인할 수 없는 인생 최대의 사건이듯이, 성령세례의 체험도 받았는지 모르는 희미한 체험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 어떻게 받았는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체험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는 믿되 성령세례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모르는 자는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성령을 받은 것도 같고 안 받은 것도 같은 상태에서는 끊임없이 정신적 투쟁을 계속하게 되기 때문에 담대한 복음 증거자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체험을 전하되 ‘너희 보고 듣는 이것’으로 명확한 체험으로 전해야만 하겠다고 역설하였다. 조용기는 그러면 이제 ‘내가 성령세례를 받을 때 어떤 증거가 나타나느냐’는 문제가 당연한 논란의 여지가 있게 될 것인데, 이 문제의 해답을 위해서는 성경 자체로 돌아가야 한다고 보면서 그 나타나는 증거들에 대해서 말했다.
조용기는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계속 성령충만한 상태가 유지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기에 성령세례를 받은 이후에는 성령충만을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해야 하며, 이를 위해 날마다 성령과 인격적인 교제를 해야 할 것을 중시하였다. 그래서 능력으로서의 성령의 은사와 인격으로서의 성령의 열매가 확실하게 나타나게 해야 한다.
성령충만이란 곧 예수 충만으로서, 외적으로는 능력있는 삶을 살아가야 할 뿐 아니라 내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필자는 한국교회 성령운동사에 있어서 조용기의 성령론이 지닌 큰 중요성이 있다고 보는데, 다음의 내용에서는 1960년대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의 저작 속에 나타난 성령론의 변화와 발전을 고찰할 것이다.
필자의 영성상담 홈페이지 http://bay.pe.kr
배본철 교수(성결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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