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역사는 30년 주기설이 있다. 크리스천무브먼트는 대부분 시작으로부터 30년 안에 조직화 되고 서서히 침체됐다. 지금의 학생선교운동이 창립시점으로부터 40년의 자리다. 제도화 되고 시들해졌다. 이 상황을 치고 나가야 하는데 그런 단체가 나오지 않고 있다. 학생운동단체의 절망상황이다"

80년대 1세대 학생운동가. 선교한국을 조직, 연합운동의 중추에서 90년대 한국 해외선교 부흥기를 이끈 핵심리더로 20년 이상 청년선교운동을 선도한 김인호 목사(추수교회 담임)의 말이다. 이제는 한 교회의 목회자로서 한국교회에 셀 사역이라는 신선한 모델을 통해 또 한번의 무브먼트를 일으키고 있는 그를 만나 현 학생운동의 문제점과 대안, 그만의 대부흥을 향한 힘찬 발걸음을 들어봤다.

학생운동에서 선교연합운동으로...

죠이선교회 기획실장을 하며 학생운동에 전념하던 김인호 목사는 86.87년 선교한국을 조직해 선교연합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초기 선교한국은 연합에 포커스를 두고 개성이 강한 개개 단체가 연합하기 시작했다. 선교한국을 통해 연합이라는 새로운 선교주제를 제시하고 한국교회에 미전도 종족선교등의 이슈와 미완성 과업을 던졌다. 가히 한국 선교흐름의 판도를 뒤흔든 시점이다.

선교한국의 파생효과는 엄청나다. 대회가 끝나면 전국에서 700~800여개의 기도운동이 일어나고 전국 대도시를 순회하며 한국교회와 나라의 현실을 두고 기도합주회가 진행됐다. 당시 이러한 움직임은 한국 선교에 엄청난 충격을 준다. 빔프로젝트를 기독교 영상문화에 처음 도입하고 다양한 콘서트는 부흥한국과 같은 모임의 모델이 됐다. 학원복음화협의회도 선교한국의 열매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반면 얼마 전 막을 내린 '2004 선교한국대회'는 학생선교단체의 연합정신이 문제의 화두가 되기도 했다. 김 목사는 이에 대해 학생선교단체가 연합하려면 연합의 의미를 느끼는 것이 먼저라고 꼬집었다. 이미 선교단체 내부적인 시스템으로 선교동원이 가능한 상황에서 굳이 선교한국을 통한 연합을 지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울러 김 목사는 선교한국대회가 날로 내용이 깊어지고 새로운 주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서 강사, 시설, 주제선택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강조했다.

30년 주기설로 말하는 선교운동의 현주소

김 목사는 선교운동의 침체를 30년 주기설을 설명한다. 크리스천무브먼트의 대부분은 30년 안에 흥망성쇠를 보인다는 것이다. 초대 설립자로 일어난 운동은 20년 시점에서 물질이 생기고 제도화가 시작, 절정기를 맞는다. 그러다 30년대가 되면 서서히 침체국면으로 들어간다.

우리나라 학생선교운동도 C.C.C.가 1958년에 시작했고 여타 단체도 비슷한 때 일어난다. 현재 40년의 자리에 선 것. 초기열정은 온데간데 없고 답답한 선교일선의 목소리만 간간히 들려온다.

김 목사는 20년의 자리에 있었던 학생운동시절을 회고하며 정말 배고팠던 때라며 헝그리 정신 하나로 민족복음화, 세계복음화를 외쳤다고 말했다. 당시는 학생운동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헌신이었다며 치열했던 선교운동 시절을 설명했다. 그리고 이미 쇠퇴 국면에 들어간 현 선교를 뒤집을만한 무브먼트를 일으킬 단체가 출현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한다.

선교단체의 불신자 전도 약화.. 개척적, 실험적 사역이 곧 존재 목적

그러면 모든 선교운동은 결국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숙명을 안고 일어난다는 것인가. 세월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닌 세월을 따라 인간이 늙어가듯 인간의 열정도 늙어버리는 것이 문제가 아닐까.

김 목사는 이런 점에서 불신자 전도가 이루어지지 않는 선교단체의 영적침체를 날카롭게 지적했다. 50-70년대만 해도 학생선교단체 활동을 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단이라고 평가받는 시대였다. 단체들은 생존 그 자체를 위해 전도,양육, 파송(선교) 라는 큰 3가지 주제로 캠퍼스를 흔들었다. 50-70년대는 누가 뭐래도 선교단체의 캠퍼스 전도시절이다. 단체의 생명을 위해 전도는 필수였던 것이다.

70년대-80년대는 제자양육이 열풍을 일으켰고 교회에 신선한 충격을 준다. 교회가 학생선교단체의 장점을 다시 보게 되고 벤치마킹하는 현상이 생기게 됐다. 교회의 시각이 바뀌고 당시 교회 청년부가 담아내지 못한 청년들은 선교단체로 몰리게 된다. 불신자를 전도하지 않아도 교회 다니는 청년들이 선교단체로 발걸음을 재촉했고 이는 곧 선교단체의 불신자 전도라는 사명감을 퇴색시키는 원인이 된다.

김 목사는 선교단체의 존재 목적이자 역할은 교회에서 시도하지 못하는 실험적 사역, 특수 사역을 과감하게 펼치는 것이라 말했다. 교회의 역할과 영역이 겹칠때 교회와 선교단체간의 갈등의 골은 깊어진다는 것이다.

선교연합운동에서 교회운동으로...

대단한 선교동원가가 어느 날 교회 목회자가 되어 돌아왔다. 김 목사는 유럽에서 셀 교회를 만나 도전을 받고 건강한 선교운동은 건강한 교회가 있을 때 가능하다는 생각에 이른다.

그는 1999년 싱가폴에서 성경적 교회의 온전한 회복을 통한 세계복음화에 대한 비전을 받은 후 국제터치셀사역 한국본부(터치 코리아)원장으로 수천명의 목회자에게 셀교회 훈련을 했다. 그리고 셀교회 원리로 추수교회를 개척하게 된다.


셀은 한국교회의 대안.불신자 전도하지 않는 교회는 가라

불신자 전도를 표방하는 추수교회. 김 목사는 불신자 전도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입장이다. 추수교회는 대형교회를 지향하지 않는다. 교회가 커지면 전도적 생명력이 죽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 목사는 셀이 한국교회의 새로운 대안이 될 것으로 확신했다.

2002년 초 자택에서 9명이 시작한 셀교회는 15개의 셀로 번식. 500여명의 불신자를 부른 교회로 자랐다. 이에서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교회를 개척한다. 교회를 개척하는 교회. 모교회에서 개척역량이 어느 정도 갖춰지면 검증된 목회자, 음악팀, 전도개척팀 가정들로 개척팀이 구성된다. 일반적으로 회중이 150명이 넘어가면 개척준비를 서서히 시작한다. 이렇게 40-50명의 성인을 떼어 다른 지역을 개척하고 개척된 교회는 제2, 제3의 추수교회가 된다.

셀 교회야말로 사도행전적 초대교회 원리라고 김 목사는 말한다. 추수교회의 주일예배는 셀연합축제라고 할 수 있다. 김 목사가 대표로 있는 KISA(한국학생선교회)도 이런 셀개척훈련을 통해 영성이 뛰어난 목회자와 선교사들로 양성하고 있다.

KISA는 원래 김 목사가 신학교 재학시절 신학생 기도모임이었다. 신학생들이 더 전도를 못한다는 김 목사. 불신자를 전도해 교회를 짓는 것을 목표로 5년 전 KISA로 모임을 바꾸고 셀 개척교회를 세우는 데 주력한다.

신학교 중심사역에서 건국대를 기점으로 경희대 등 일반대학에서도 셀 사역을 시작해 김 목사는 캠퍼스마다 건강한 셀 교회를 세울 것을 계획하고 있다. 현재 중국에도 셀 사역을 시작, 향후 10년 내 300여개의 셀 교회를 한국, 중국, 모슬렘권에 개척하는 것이 비전이다.

정형화된 한국교회의 패러다임인 건물, 성직자, 설교, 직분의 틀에서 벗어나 셀에서 가족공동체를 경험하고 치유의 역사를 일으키기 원하는 김 목사. 그의 신념을 따라 추수교회 성도라면 셀훈련을 피할 수 없다.

90년대 이후 주일학교, 교회 청년부가 반토막이 되고 목회자 비리등으로 그 명성이 땅으로 떨어졌다. 사회적 환경 또한 부흥의 불을 당겼던 때와 판이하게 달라졌다. 민주화, 번영화, 자유화가 계속되면서 서구사회가 그랬듯 한국교회도 목표를 잃고 서서히 시들어 가고 있다.

이 문제 앞에 셀을 들고 나온 김인호 목사. 불신자 전도를 지향하며 곳곳에 초대교회를 다시금 재현시키려는 그의 포부가 꼼짝하지 않는 한국교회의 바퀴를 다시금 굴리는 엔진이 될 지 주목되고 있다. 추수할 곡식은 많으나 추수할 일꾼들의 손이 둔해진 현재 추수교회의 새로운 움직임과 김인호 목사의 또 다른 선교운동의 추이가 기대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