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전 705년 앗수르 제국의 사르곤 2세(Sargon II)는 고국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사망하였다. 앗수르 제국에서 왕이 궁을 떠나 전쟁터에서 사망한 예로는 사르곤 2세가 유일하다. 강력한 신들의 전폭적인 지원과 신들의 압도적인 무기로 무장한 앗수르 군대는 많은 나라들을 정복했다. 그런 신들의 지원을 받는 전쟁에서 사르곤 2세의 죽음은 앗수르의 절대 명성을 크게 추락시켰다. 이제 많은 나라들은 사르곤 2세의 죽음의 소식을 들으면서 반란을 꾀하게 되었다.

유다를 공격하는 앗수르의 원정 경로(1)
(Photo : 기독일보) 기혼샘

주전 704년 사르곤 2세의 아들인 산헤립이 왕위를 계승하였을 당시, 앗수르 제국에는 반란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반란을 일으킨 나라들은 새로운 왕인 산헤립이 그의 선왕이었던 사르곤 2세나 디글랏 빌레셀 3세와 같지 않기를 기대했다. 유다 왕국인 히스기야는 사르곤 2세가 사망한 주전 705년 앗수르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산헤립은 앗수르 제국을 건설한 왕은 아니지만, 그는 다른 앗수르 왕들보다 탁월하였다. 후계자인 산헤립은 먼저 자신의 왕국을 거대하게 재건하였다. 왕국인 니느웨는 현대 이라크의 북서쪽에 위치한 티그리스 강을 끼고 있었다. 산헤립은 니느웨를 거대한 정원으로 꾸몄으며, 왕국에 수로를 설치한 첫 번째 도시 설계자였다. 그가 남긴 니느웨의 흔적은 산헤립이 매우 비범한 인물이었음을 알려준다. 산헤립은 제국에서 일어난 반란 세력들을 간과하지 않았다.

히스기야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며 종교개혁을 단호하게 실천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이전의 왕들과 전혀 다른 왕으로 나라를 통치할 것에 대한 백성들에게 심어주었다. 앗수르에 반란을 시도한 나라들은 유다 뿐 아니라 블레셋 민족, 페니키아, 소아시아 일부 지역, 그리고 바벨론도 있었다. 히스기야는 북쪽의 앗수르 세력을 막기 위하여 남쪽의 이집트를 의지하였다.

비록 사르곤 2세는 전터쟁에서 사망했지만, 앗수르 제국의 힘이 절정에 달했을 때에 산헤립은 왕위를 계승하였다. 앗수르 군사는 10만이 넘었다. 그럼에도 앗수르 군대는 새로운 반란 세력들의 연합에 직면하였다. 산헤립에게 있어서 유다의 반란은 앗수르에게 고질적인 적인 바벨론을 격퇴하는 것에 비해 덜 중요하였다. 산헤립은 처음에는 바벨론의 므로닥 발라단 (MerodachBaladan)과 전쟁하였다. 므로닥 발라단은 갈대아의 부족들과 엘람 (Elam)의 연합 세력들의 도움을 받았다. 엘람은 지금의 이란 남쪽에 속한다. 산헤립은 통치 초기 몇 년은 바벨론을 진압하고 엘람을 향하여 출전하였다.

주전 701년 이전에는 산헤립의 군대는 시리아의 서쪽으로 출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전 701년 산헤립은 페니키아를 공격하였다. 산헤립은 시돈 왕인 룰리(Luli)의 반란을 진압하고 룰리 왕국에 봉신 투발루(Tuba’lu)를 통치자로 임명하였다. 두로와 시돈의 도시들은 피 흘림 없이 점령했고 주변 도시들은 함락되었다. 해상 국가인 페니키아는 앗수르가 지중해 무역의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열쇠가 되었다. 블레셋도 앗수르에게는 특별히 중요한 지역이었다. 블레셋 지역은 사르곤 2 세의 역사적 문헌에도 언급되었듯이 이집트와 직접 무역이 가능한 곳이다.

유다를 공격하는 앗수르의 원정 경로(1)
(Photo : 기독일보) 히스기야터널

앗수르에게 있어서 유다는 페니키아와 블레셋의 중간이란 지리적 이점이 중요하였다. 유다 왕국 그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앗수르인들은 그들의 ‘신들이 자기들에게 부여한 세상을 정복하라’는 신탁에 충실한 전쟁을 수행한다고 믿었다. 히스기야 역시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며 제국을 팽창하려는 거대한 야망을 가진 앗수르 왕에 맞서 나라를 다스릴 책임을 갖고 있었다. 히스기야의 반란은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왜냐하면 디글랏 빌레셀 3세는 히스기야의 선왕인 아하스를 위기로부터 구원한 왕이기 때문이다. 아하스가 통치할 당시 아람과 북 이스라엘은 연합하여 유다 왕국을 공격하였다. 이에 아하스는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 3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히브리 성경은 이 사건에 대해 기록하였다. 이에 디글랏 빌레셀 3세는 유다를 돕기 위해 아람과 북 이스라엘을 공격하였고 남 유다는 위기에서 벗어났다(왕하 16:7).

그러나 히스기야는 아하스와 다른 열정을 갖고 있었다. 아하스에 대한 열왕기하 16장의 기록은 ‘이방 사람들이 행한 것처럼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했던 악한 왕’으로 묘사하고 있다 (왕하 16:3). 아하스는 다윗과 같지 않았고,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도 정직하지 않은 왕이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유다의 대표적으로 신실했던 두 왕 (요시아와 히스기야) 가운데 한 왕이었다. 히스기야는 아하스의 후계자로 악한 자에게서 선한 왕이 나온 것이다. 선한 왕에게서 악한 왕이 나오기도 한데, 히스기야의 므낫세가 그런 경우이다.

히스기야는 국가적 위기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였다. 열왕기하 18:3-6절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곧 저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이에 하나님은 히스기야와 함께 하셨고 히스기야로 하여금 형통하게 하셨다. 그로 전쟁에 나가게 하시고 앗수르 왕에 대하여 반란을 시도하고 승리하게 하셨다. 열왕기하 18:7 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저와 함께 하시매 저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저가 앗수르 왕을 배척하고 섬기지 아니하였으며 블레셋 사람을 쳐서 가사와 그 사방에 이르고 망대에서부터 견고한 성까지 이르렀더라.

히스기야는 이전의 왕들과 같지 않았다. 그는 이사야 선지자의 확실한 지지를 받았다 (사 38:4-8)(1) . 결과적으로 앗수르는 앗수르대로, 히스기야의 유다는 유다대로 이들과 격돌하는 전쟁을 자기들이 섬기는 신들에 의한 거룩한 전쟁으로 받아들였다.

히스기야는 경건할 뿐만 아니라 용의주도했다. 그는 예루살렘의 성벽을 다시 쌓고 요새화했다. 사실 히스기야는 주전 712년 사르곤 2세가 원정에 나섰을 때부터 나라를 견고히 하였다. 그러나 당시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않고 군사력을 의지한 것에 대해 이사야는 책망하였다. 이사야 22:10-11절에 기록되기를: 예루살렘의 가옥을 계수하며 그 가옥을 헐어 성벽을 견고케도 하며 너희가 또 옛못의 물을 위하여 두 성벽 사이에 저수지를 만들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이 일을 하신 자를 앙망하지 아니하였고 이 일을 옛적부터 경영하신 자를 존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유다를 공격하는 앗수르의 원정 경로(1)
(Photo : 기독일보) 실로암 비문

군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성벽을 견고히 하고 성벽 바깥으로부터 물을 성 안으로 끌어오는 수로 건설은 예루살렘을 방어하기위한 필수불가결한 조치였다. 히스기야가 건설한 수로는 기혼샘에서 실로암 연못까지 약 533 미터의 위대한 역사적 흔적이다. 히스기야 수로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이 1880 년 실로암 연못에서 수영을 하던 팔레스틴 소년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 기념비는 앗수르 공격에 대비하여 수로 건설에 동원되었던 인부들이 기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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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에 여호와의 말씀이 히스기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오년을 더하고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한 것을 네게 이룰 즐거로 이 징조를 네게 주리라 보라 아하스의 일영표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뒤로 십 도를 물러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더니 이에 일영표에 나아갔던 해의 그림자가 심 도를 물러가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