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죽음'이고 그 다음이 '아픔'이다.어떤 의미에서는 주검보다도 더 두려운 것이 아픔의 고통인지도 모른다"죽을 때 죽더라도 아프지만 말았으면 좋겠다."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으니까 말이다.사실 죽음을 각오한 사람이나 스스로 주검을 택한 사람도 통증에 대한 두려움은 그대로 남아 잇게 마련이다.
통증은 나의 생명과 함께 시작할 정도로 오래된 것이고 나의 마지막 호흡만큼이나 가까이에 있는 것이다.사람에게 있어서 생명과 통증은 영원히 얽혀있고 서로 떨어 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우리는 통증 속에서 태어나고 통증의 그림자 밑에서 평생을 살아가고 통증 속에서 죽어 간다.통증은 우리의 생존 그 자체의 일부분인 것이다.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시고 또 그의 짝을 만들어 주기 위해 "아담을 깊은 잠에 빠져들게 한 후 갈비 하나를 떼 내었다"고 되어 있다.하나님이 아담을 "깊은 잠"에 들게 한 것은 수술할 때 아담이 아플까봐서 전신마취를 하셨다는 뜻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첫번째 마취의사'가 되는 셈이고 또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도 통증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도 되는 셈이다.
그러면 이와 같이 우리의 생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이 "통증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생길 것이며, 이 질문에 대하여는 불행하게도 명쾌한 대답이 없다.
"아픔이 이런 것이다"라고 뚜렷하게 집어서 이야기 할 수도 없거니와, 이 사람의 아픔이 저 사람에게는 아무런 아픔이 아닐 수도 있고, 반대로 저 사람의 아픔이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바늘로 찌를 때 따끔하게 아픈 것뿐만 아니라 골치도 아프고 심지어 마음도 아프기 때문이다.
흔히 통증은 몸의 일부분이 망가지고 있으니 "빨리 손을 쓰라는 경고의 싸인이다"라고도 말한다.미리 알려주어 미리 손을 쓰고 병을 조기에 치료를 할 수 있을 경우 환자들은 "고마운 통증"이라 한다.
그러나 어떤 암 환자가 통증을 느낀다고 하면 그것은 이미 꽤 진전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 된다.몸속에 어딘가 암이 생기자마자 좀 미리 아파주엇으면 조기치료가 가능했을 터인데 말이다.
얼핏 생각하면 우리를 기분 나쁘게 만들기 싫다고 느낌을 주는 맛이 쓴맛이고, 우리를 불쾌하게 만들고 괴롭히는 것이 통각이다.따라서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를 기분 나쁘게 만들고 괴롭히는 느낌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우리가 느끼는 감각에는 다 의미가 있는 것이다.
생을 영위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생명을 영양하고 방위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뜻이다.아픔도 "지금 내 몸에는 무엇인가 잘못 되어 가고 있으니 빨리 손을 써서 개선시키라:는 신호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픔이라는 것은 괴로울지라도 고마워해야 하는 경고성 신호이다.선천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통각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통각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모두 일찍 사망한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아픔을 느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아픔에는 여러 가지가 있따.몸의 아픔은 통각이요, 마음의 아픔은 통증이요, 영혼의 아픔은 고통이다.이 모두가 다 "잘못 되어 가고 있는 것을 빨리 개선하라"는 경고이다.
고통은 "싫고 괴로운" 그러나 "고마운 마음으로 따라야 하는"그리고 "행동으로 개선해야 하는 "명령이다.그렇게 하면 신령이 편안해 지는 축복으로 이어질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심신령이 망가지는 파멸로 연결될 것이다.
아픔도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몸의 아픔도 맘의 아픔도 이겨 낼 수 있는 사람이다.아픔을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아플 때나 안 아플 때나 진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다.
아픔의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영적으로도 건강한 사람이다.고통의 의미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만이 참된 축복의 수혜자가 될 것이다.
글 전세일 포천중문의대 보건대학원 대체의학대학원장
통증은 나의 생명과 함께 시작할 정도로 오래된 것이고 나의 마지막 호흡만큼이나 가까이에 있는 것이다.사람에게 있어서 생명과 통증은 영원히 얽혀있고 서로 떨어 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우리는 통증 속에서 태어나고 통증의 그림자 밑에서 평생을 살아가고 통증 속에서 죽어 간다.통증은 우리의 생존 그 자체의 일부분인 것이다.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시고 또 그의 짝을 만들어 주기 위해 "아담을 깊은 잠에 빠져들게 한 후 갈비 하나를 떼 내었다"고 되어 있다.하나님이 아담을 "깊은 잠"에 들게 한 것은 수술할 때 아담이 아플까봐서 전신마취를 하셨다는 뜻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첫번째 마취의사'가 되는 셈이고 또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도 통증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도 되는 셈이다.
그러면 이와 같이 우리의 생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이 "통증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생길 것이며, 이 질문에 대하여는 불행하게도 명쾌한 대답이 없다.
"아픔이 이런 것이다"라고 뚜렷하게 집어서 이야기 할 수도 없거니와, 이 사람의 아픔이 저 사람에게는 아무런 아픔이 아닐 수도 있고, 반대로 저 사람의 아픔이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바늘로 찌를 때 따끔하게 아픈 것뿐만 아니라 골치도 아프고 심지어 마음도 아프기 때문이다.
흔히 통증은 몸의 일부분이 망가지고 있으니 "빨리 손을 쓰라는 경고의 싸인이다"라고도 말한다.미리 알려주어 미리 손을 쓰고 병을 조기에 치료를 할 수 있을 경우 환자들은 "고마운 통증"이라 한다.
그러나 어떤 암 환자가 통증을 느낀다고 하면 그것은 이미 꽤 진전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 된다.몸속에 어딘가 암이 생기자마자 좀 미리 아파주엇으면 조기치료가 가능했을 터인데 말이다.
얼핏 생각하면 우리를 기분 나쁘게 만들기 싫다고 느낌을 주는 맛이 쓴맛이고, 우리를 불쾌하게 만들고 괴롭히는 것이 통각이다.따라서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를 기분 나쁘게 만들고 괴롭히는 느낌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우리가 느끼는 감각에는 다 의미가 있는 것이다.
생을 영위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생명을 영양하고 방위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뜻이다.아픔도 "지금 내 몸에는 무엇인가 잘못 되어 가고 있으니 빨리 손을 써서 개선시키라:는 신호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픔이라는 것은 괴로울지라도 고마워해야 하는 경고성 신호이다.선천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통각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통각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모두 일찍 사망한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아픔을 느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아픔에는 여러 가지가 있따.몸의 아픔은 통각이요, 마음의 아픔은 통증이요, 영혼의 아픔은 고통이다.이 모두가 다 "잘못 되어 가고 있는 것을 빨리 개선하라"는 경고이다.
고통은 "싫고 괴로운" 그러나 "고마운 마음으로 따라야 하는"그리고 "행동으로 개선해야 하는 "명령이다.그렇게 하면 신령이 편안해 지는 축복으로 이어질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심신령이 망가지는 파멸로 연결될 것이다.
아픔도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몸의 아픔도 맘의 아픔도 이겨 낼 수 있는 사람이다.아픔을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아플 때나 안 아플 때나 진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다.
아픔의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영적으로도 건강한 사람이다.고통의 의미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만이 참된 축복의 수혜자가 될 것이다.
글 전세일 포천중문의대 보건대학원 대체의학대학원장
© 2020 Christianitydaily.com All rights reserved. Do not reproduce without permissi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