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신문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결론부터 말하면 기도하면서 읽어야 한다.얼마 전 성도들에게 "신문을 들고 기도하라"라는 제목의 짧은 칼럼을 주보에 실었다.성도들은 호기심에 끌려 그 칼럼을 읽었음이 틀림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문을 들고 화장실로 가지만 그리스도인은 신문을 들고 기도실로 가야 한다.그 기도실에서 신문을 보며 울어야 한다.분노가 아닌 애통이 있어야 한다.

시대를 보며 오늘의 예례미야가 되어야 한다.오늘날 누구도 정치나 경제, 군사 , 문화, 사회, 종교를 보고 울지 않는다.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달라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울어야 한다.그리고 사회의 진정한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한 것을 애통해하며 통곡의 강을 이루어야 한다.베드로의 가슴을 찢는 새벽 닭 울음소리가 되어야 한다.

그동안 나의 기도를 주도하였던 이기적인 기도들을 이제 그만두고 진정한 빛과 소금의 기도를 시작해야 한다.우리가 사회 속에서 무엇인가를 해야만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빛과 소금은 아주 작은 사랑을 실천하는 기도에서부터 시작된다.그렇게 신문을 들고 이 시대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는 눈물을 흘리는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오늘날 하나님은 찾고 계신다.

교회 미래학자인 레너스 스윗은 "한 귀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다른 한 귀로는 하나님의 세계에 귀 기울다"는 개념의 "이중 종소리"라는 말을 했는데,이를 영국의 복음주의 신학자 존 스토트는 "이중 청취"라고 불렀다.

그는 "이중청취"는 동시에 두 목소리를 듣는 청취 능력,즉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목소리와 우리 주변에 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능력을 말한다.

두 목소리를 모두 듣고자 하는 것은 이 두가지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발견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이중 청취는 크리스천의 제자화와 기독교 선교에 없어서는 안 될 방법이다"라고 "이중청취"를 설명했다.

이 두 사람이 하고자 했던 말의 의미를 우리는 안다.그리스도인은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고 동시에 우리의 주변과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그러나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을 둘 중에 하나에만 귀를 기울인다.

열심이 있다는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이려 하고 세상의 소리에는 귀를 막으려 한다.열심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소리만 귀를 기울일 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신문은 열심히 읽는데 성경은 단 한 구절도 읽지 않는다.불균형, 비인격적 삶이다.물론 하나님과 물질을 겸하여 섬기는 누를 범해서는 안되며, 사랑함에 있어서도 우선순위를 바꾸어서도 안된다.

그러나 인자에게 한 것이 곧 주님에게 한 것이듯, 인자의 소리를 듣는 것이 그를 통해 내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일 수도 있음을 깨닫고 이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의 소리는 신문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진다.요즘 인터넷을 통하여서도 세상의 소리를 듣는다.그러나 인터넷 기사를 읽은 사람이 가판대의 신문을 구입하는 것이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진풍경이다.세상을 향해 귀를 막으라고 그리스도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도리어 세상을 향해 귀를 열라고 말씀하셨다.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모든 것을 끝내려 하지 않으신다.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을 통하여 세상을 보시며 사랑하고자 하신다.

그리스도인을 통하여 세상의 필요를 채우시며 세상의 역사를 주도하여 가신다.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좋아하고 노래하며 암송하는 요한복음 3장 16절은 무엇이라 했는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셨는데, 그 이유가 "세상을 사랑하셔서"라고 하신다.하나님의 관심은 예나 지금이나 세상이다.

그 세상에 살던 내가 그 사랑의 대상으로 은총을 입어 남 보다 먼저 그리스도인이 되는 기쁨의 주인공이 되었다.그리고 동시에 세상을 향한 사명자로 부름 받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