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
로버트 뱅크스 | 신현기 역 | IVP | 80쪽
이 책은 마치 VR 영상을 보는 듯하다. 책의 내용은 한 관심자가 초대교회의 가정교회를 방문해 그곳의 예배모임을 찾아가서 끝나고 돌아오는 이야기다.
이 속엔 특별한 사건도 없다. 그 모임에서 중점적으로 다루어지는 주제도 특별히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이 책은 그 모임의 구석구석을 독자들이 살펴보고 관찰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마치 이전 영화가 관객들에게 감독이 선택하여 편집한 장면만을 보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면, 로버트 뱅크스는 독자들이 그 모임을 독자들이 찬찬히 살펴보도록 VR 영상을 제공하는 듯하다. 좀 올드하게 표현한다면 오즈 야스지로가 '동경이야기'에서 담아내는 화면처럼, 그저 일상적이고 평범해 보이는 듯한 사건들을 그저 이 책 속에 담담히 담아낸다.
어쩌면 독자들은 당황할지 모른다. 그래서 이 초대교회 모습이 어떻다는 건지? 굳이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지? 하고 당혹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가 로버트 뱅크스라면 달라진다. <바울의 공동체 사상>과 <교회, 또 하나의 가족> 등을 통해 초대교회에 대한 연구와 그것을 현대의 가정교회론으로 이끌어내는데 노력하는 저자를 생각한다면, 이 책이 얇고 평범해 보이지만 읽어 나갈수록 그리 녹록치 않은 책임을 깨닫게 된다.
로버트 뱅크스는 폴 스티븐스와 더불어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 초까지 개인적으로 좋아했고 주목하던 저자들이었다. 폴 스티븐스가 평신도 신학에 두각을 나타내었다면, 로버트 뱅크스는 초대교회의 교회론을 재해석해 현대 교회의 공동체에 어떻게 접목할 것인지를 보여준 저자가 아닐까 생각한다.
특히 2000년을 전후해 한국교회는 교회 조직의 변화에 있어 양 갈래 길에 들어선 시점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갖는다. 크리스티안 슈바르츠의 '자연적 교회성장'이 동기가 되어 셀처치와 가정교회라는 두 가지 형태의 소그룹 운동이 강하게 주목받았던 것 같다.
엄밀히 이야기하면 '자연적 교회성장'과 '셀처치'는 이질적이다. 셀처치의 이념이 홍콩과 중남미에서 양적 교회부흥의 원동력을 제공했다면, 가정교회 이념은 소그룹의 내적 교제와 질적 성장에 좀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한국교회의 양적 부흥기에 조나단 에드워즈보다는 찰스 피니를 선택했던 것처럼, 한국교회의 흐름은 양적 성장으로서의 셀처치로 흘렀던 듯 싶다.
하지만 이 셀처치조차도-자연적 교회성장도 그러했지만-그 기본 마인드보다는 방법론적으로 접근했기에 많은 문제점을 태동시켰고, 일부 교회는 기존에 자신들이 갖고 있던 교회의 체질마저 약화시키는 문제도 발생시킨 듯 하다.
그렇지만 그 와중에도 한국교회 일부에서는 셀처치가 아닌 가정교회에 주목했고, 외형적 교회성장과 조직에 집착하는 모습을 극복하고 내적 성숙으로 가려는 소그룹 운동에 힘쓰고 고민해온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로버트 뱅크스의 '1세기 교회예배 이야기'가 원서보다는 많이 늦었지만 번역되어 나온 것은 주목할 만하고 반가운 일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책은 얇고 평범해 보이며, 그저 초대교회의 모습을 작가의 역사적 자료에 대한 연구와 상상력이 결부되어 그 일면을 그려낸 것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 책을 조심히 들여다 보면, 로버트 뱅크스는 바울서신 속에 나타나는 초대교회의 편린들을 모아 재구성해낸다. 일차적으로 뱅크스는 우리가 상상하곤 하던 초대교회의 모습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다. 그 조각들을 통해 2차원적 그림에 3차원적 상상력과 4DX 같은 감각을 느끼게 한다. 이것을 통해 초대교회의 예배와 모임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또한 저자는 바울서신 곳곳에 등장하는 초대교회의 여러가지 모습과 이슈를 녹여 담아낸다. 지금의 성찬식과는 달리 자유로운 모습을 담아내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주인에 의해 해방된 종들과 거듭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더 이상 계급이나 인종, 남녀노소의 차별이 없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은사 문제의 논쟁과 가르침을 얼핏 그리기도 하고, 구도자에 대해 닫힌 공동체가 아니라 열린 모임이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더구나 이 책은 성도의 시각이 아니라, 이 모임에 초대받은 관심자인 푸블리오스의 시각을 통해 초대교회를 최대한 제3자적 입장에서 객관화시켜 담아내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즉 저자는 독자들조차 비신자였던 푸블리오스처럼 3자적 입장에서 관찰하여 스스로 깨달아가도록 돕는다. 초대교회가 그러했던 것처럼 일방적이거나 권위적인 가르침의 전달이 아니라 스스로 느끼고 체험해가도록 한다.
결국 이러한 과정을 통해 독자들은 지금 현대교회의 모습과 상당히 다른 초대교회의 모습을 통해 지금 교회가 어떤 변화를 겪어야 할지를 느낄 수 있도록 돕는다. 특히나 이 책은 현대 교회가 전통이고 성경적이라 믿는 예배의 형식과 초대교회의 예배는 상당히 다를 수 있음을 독자들에게 시사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공동체의 새로움을 꿈꾸는 이들이 바울 서신을 뒤져 가며 서로 토론하고 고민하는 시간을 갖는다면 상당한 유익을 줄 좋은 책이다.
이렇게 이 책이 상당히 유익하고 도전적인 책이긴 하지만 지면상의 한계와 저자의 의도성으로 인해 글자 그대로 초대교회의 예배의 한 장면만을 담아내는 한계성과 함께 시대적 갭과 환경의 차이도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먼저 초대교회의 한 장면만을 담아냈다는 것은, 로버트 뱅크스가 꿈꾸는 가정교회의 모습처럼 내적 친밀도는 강조되지만, 사도행전 전반에서 나타나는 초대교회의 부흥과 성령 하나님의 강한 간섭은 외면하는 듯 싶다.
이 책에서 교회는 인종, 계급, 성별의 차이까지 극복하는 보이지 않는 혁명성을 이미 내포하고 있고 구도자에게도 열린 공동체의 모습도 보이지만, 초대교회의 전도와 선교의 역동성에 대해서는 소홀히 여기는 듯 비춰지는 것은 단순히 책 분량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저자가 갖고 있는 교회론의 강조성에서 나타나는 모습이기도 하다.
물론 사도행전 전반부에 등장하는 초대교회의 부흥과 역동성은 초대교회의 초기적 특이성으로 볼 수도 있기에, 저자가 굳이 다루지 않았을 수도 있다.
또한 책은 1세기 교회 이야기란 이름으로 현대교회와의 시대적 갭을 이미 선언하고 있긴 하지만, 초대교회의 예식이나 제도에 대한 자유로움에 비해 현대교회의 예식의 정형화로만 볼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일이다.
예컨대 초대교회가 형식에 자유로울 수 있었지만, 바울서신에서도 나타나듯 초대교회도 점차 여러가지 문제에 부딪히고 그것의 옳고 그름을 가르고 원칙을 정하는 모습이 보여지고 있다는 것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또 저자는 마치 초대교회가 리더는 있지만 상당히 개방적이고 비주도적 리더십을 보여주는 것처럼 표현한다. 하지만 유두고 사건에서 알 수 있듯 바울 같은 설교자가 초대교회에도 있었음을 성경은 여러 곳에서 보여주고 있다.
또 권면과 치리, 양육과 가르침이 있었음을 성경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음을 본다면, 저자의 초대교회 묘사는 부분적이고 제한적일 수 있다. 물론 얇은 책이기도 하고 어떤 논리를 학문적으로 기술하려는 의도가 없는 책을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나의 무리수일 수도 있겠다.
이 책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쉬움일 뿐이다, 설혹 내가 거론한 문제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더라도, 이 책은 유익하고 같이 공부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이 책을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성경 본문을 찾아보며 공부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모든 책이 다 그렇겠지만, 이 책은 읽고 토론하는 것으로 그칠 책이 아니다. 직접 적용하고 실천해 나가며 공동체의 변화를 위해 힘쓰지 않으면 되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던 셀처치 붐과 가정교회에 대한 시도들이 한국교회에 시도되긴 했지만, 그것을 제대로 적용한 것도 드물었고 또 그 적용과 실천을 지속적으로 이끌어가지 못하고 문제점을 유발한 것도 그런 연유이다.
하지만 이것을 실천적으로 적용하고 힘쓸 때 교회는 달라진다. 이전 부교역자로 사역했던 교회도 개척 초기부터 구역모임을 가정교회로 시도했었고, 평일에 가정에서 모여 깊이 있는 교제를 이루었으며, 믿지 않는 배우자가 이 모임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거나 초신자였던 성도가 영적으로 성장하는 일들도 빈번하게 있었다. 가정의 치유와 서로 돕는 일들도 있었다.
가정교회를 급진적으로 실천하고 세미나까지 열었던 여러 교회들이 실패하던 때에도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나름 가정교회를 모범적으로 이끌어 갔었다. 이후 몇 가지 문제를 거치며 그 동력을 상실한 아픔이 있긴 했지만, 상당한 모범적 모습을 보인 중요한 케이스라고 생각한다.
또 평신도 때 직장을 다니며 이끌었던 양육팀들도 다양한 성격의 이들이 모여 공부하면서 깊은 삶의 나눔과 치유가 있었다. 유형적인 교회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로서 예배와 양육, 치유가 일어나는 건강한 모임을 꽤 길게 이어갔고, 지금도 그때 멤버들과 여러가지 형태로 교제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종종 가정교회를 표방하는 모임들이 깊은 모임을 갖는 듯 하지만, 서로 간에 있어 피상적인 교제와 나눔이 있는 경우도 많다. 그것을 깨뜨리고 보다 깊은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현대교회는 이 동력을 상당히 잃은 듯 하다. 그 대표적 증거 중 하나가 심방의 약화다. 이것은 단지 목회자가 성도의 가정을 방문하는 것의 의미를 넘어선다. 가정을 오픈하지 않음은 삶의 영역을 개방하는 것을 제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심방이 아니더라도 가정교회의 성공은 가정의 오픈이고, 그 속에서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져야 한다. 가정을 오픈하고 그 안에서 나눌 때 목회자가 굳이 아니더라도 공동체는 깊은 교제의 단계와 친밀도로 나아간다.
또 부부간의 따로 모이는 모임이 아니라 부부가 하나 되어 모이는 모임일 때 진정한 나눔과 부부끼리도 하나 되는 현상이 벌어진다. 이전 교회에서는 부부가 한 작은교회에 같이 들어가는 것을 기본으로 했다.
그러다 보니 성경에서 보이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같은 부부간의 영적 리더십으로 변화를 경험하는 일이 여럿 있었다. 성경주석가들은 아마도 브리스길라가 아굴라보다 먼저 믿었고 신앙도 성숙되었지만, 점차 아굴라의 영적 성장으로 그 리더십이 바뀌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 단 이것은 남편이 무조건 영적 리더십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기 위함은 아니다.
많은 교회의 가정교회 변화 실패는 가정교회를 제도와 프로그램으로 적용하려 한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니다. 가정교회는 어느 것보다 유형적 공동체를 넘어 유기적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그럴 때 진정 초대교회처럼 교회는 다시 역동적인 생명력을 회복할 수 있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문양호 목사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함께만들어가는 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