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부상을 당했다가 회복기에 접어든 한 청년이 1919년 시카고에 있는 작은 아파트 하나를 빌렸다. 그가 그 집을 고른 것은 근처에 유명한 작가 셔우드 앤더슨의 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앤더슨은 널리 격찬을 받은 소설 ‘윈저버그, 오하이오’를 집필했으며 젊은 작가들을 잘 돕는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다.

두 사람은 금방 가까워졌으며 2년 동안 거의 매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함께 식사를 하고 멀리 산보도 나갔으며 기교에 대해서 밤늦게까지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젊은이는 자기의 습작들을 종종 앤더슨에게 가져갔으며 그 노련한 작가는 잔인할 정도로 솔직한 비평을 가했다. 그러나 그 젊은 작가는 결코 낙심하지 않았다. 매번 그는 경청하면서 조심스럽게 노트에 메모해 갔으며 그런 다음 원고를 향상시키기 위해 타자기와 함께 살다시피 하였다. 그는 자신을 방어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후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셔우드 앤더슨을 만날 때까지는 어떻게 글을 쓰는지 조차 몰랐다." 이 청년은 헤밍웨이였다. 그 후에 앤더슨은 뉴올리온즈로 이사가서 거기서 또 한 청년을 도왔다. 그는 윌리엄 포크너였다.

열망을 품고 있는 작가들에게 있어서 멘토로서 도움을 준 앤더슨의 역할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캘리포니아에서 그는 수년 동안 여러 작가들 중에서도 극작가 토마스 울프와 존 스타인백이라는 젊은이와 함께 작품활동을 했다. 앤더슨의 문하생 중 세 명이 노벨 문학상을, 네 명이 퓰리처 문학상을 탔다. 유명한 문학 평론가 말콤 카울리는 앤더슨을 평하기를 ‘다음 세대의 문체와 비전에 자신의 자취를 남긴 그 세대의 유일한 작가’라고 했다」

신념은 우리의 삶을 인도하는 힘이며 결단을 내려야 할 때 훌륭한 지침이 되어 인생의 기초가 된다. 이러한 신념을 우리는 철학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예수님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늘 확신하셨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5:34).

강한 신념은 먼저 삶에서 의심을 몰아낸다. 지도자는 두 마음을 품으면 안 된다.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 1:6­8).

강한 신념은 또한 행동하게 하는 동기를 부여한다. 자기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신념을 갖는 것은 그 일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가능성에 대해 자신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 일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고 노력을 하게 된다.

강한 신념은 역시 철저히 헌신하게 한다. 예수님은 생사를 하나님의 뜻에 맡기셨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왜 우리는 교사이며 교육을 해야하는가? 이 질문에 확고한 답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하는 일에 목숨을 걸 수 있으며 교사가 교육에 목숨을 건다면 성공하는 교사가 될 수 있다.

먼저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한다.

마 28:19의 지상위임명령이다. 주님은 12명의 제자와 120명의 문도들, 나아가 500여명의 부활의 증인들에게 간곡히 부탁하셨다. “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이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위임하신 명령 중에 가장 큰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최선의 모습으로 순종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강조해야할 것은 주님에게 배운 모든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그들로 하여금 그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고 수용하여서 그대로 살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전도가 아니라 교육, 즉 양육을 의미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행 1:8의 증인이란 소명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여기서 주님의 온전한 증인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든 것을 본대로, 그리고 아는대로 증거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이 왜 죽으셨는지, 그로 인해 우리에게 어떤 효력이 발생하는지, 그 분이 하신 일을 우리는 어떻게 수행할 수 있는지 이야기하고 그 내용을 몸으로 보여주며 또 그대로 살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다.

유능한 증인은 자신이 일을 잘 할 뿐 아니라 훈련받는 사람들이 최선을 다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요 14:12) 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둘째, 교육이 가장 가치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왜 사는가? 산에 많은 나무들이 자라는데 그 가운데 곧게 자라서 나중에 좋은 목재로 쓸만한 것이 많지 않다. 해마다 모든 나무는 몇 뼘씩 자라는데 쓸모 있는 나무만 자란다면 오직 좋을까 생각한다.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상당한 정도로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인간은 인격적인 존재요 유일하게 자율적인 피조물이다. 인간만이 선택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거기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있다. 나아가서 모든 인간은 자신의 삶의 의미를 결정해야 하고 그것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는 왜 사는가? 그저 되는대로 사는 허무주의나 쾌락주의가 우리의 삶의 목적이 될 수 없고 비록 감동적이기는 하나 개인의 가능성을 구현하는 자기완성주의도 아니다. 내가 잘 되면 남들이 배가 아프다. 나의 성공은 남의 실패를 전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성공의 결과를 남과 나누는 사랑이라면 나와 주변의 우리 모두가 행복해진다. 사랑이 인생의 가장 귀한 가치이다.

그러나 이 사랑 중에서도 단계가 있다. 나의 가진 것을 적당히 나누어 주는 일, 함께 있어주고 물질을 나누어주는 것도 좋지만 나의 모든 것을 다 유산으로 주는 자녀사랑이 더 크다. 그리고 이보다 더 강력한 사랑은 나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상대방을 나의 수준으로 훈련시키는 것이다. 생선을 달라고 하는 자녀에게 뱀을 주는 부모가 없고 대부분의 부모는 사랑하는 자식에게 생선을 주지만 현명한 부모는 나중에 내가 줄 수 없게 될 때를 대비해서 자녀에게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서 언제나 생선을 먹을 수 있게 해준다.

셋째, 교육의 댓가가 너무나 좋기 때문이다.

살전 2:19-20절에 “주님이 오실 그 날 내가 받을 면류관이 무엇이냐 바로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나의 자랑이며 너희는 나의 기쁨이다“라고 하고 있다. 이전에 자기를 핍박했던 데살로니가에 있는 그 교회 성도들이 이제는 ‘내 자랑이다 내 기쁨이다‘라고 말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제자를 키워본 사람이면 다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자신이 심혈을 기울인 제자들을 생각하며 한번 교사는 영원한 교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장점이 있다. 교사의 할 일은 그것을 감지하고 학생 스스로가 깨닫고 계발하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하루만 보지 않아도 조금씩 성장하는 아이를 발견하는 부모의 눈으로 자라나는 학생들을 기뻐하고 자랑해야 하는 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정말 귀한 은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교육을 해야하는가를 잘 이해하고 이 일을 위하여 최선을 다 하는 교사가 되어야 한다. 한번 교사는 그 하는 사역의 가치를 알기에 영원한 교사가 되어야 한다.

※ www.c3tv.com <<손종국목사의 교사대학>>에서 필자의 동영상강의를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청소년교육선교회 대표 손종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