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향한 목마름
게리 토마스 | 윤종석 역 | CUP | 488쪽
영적 목마름
우리 마음 속에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알고, 사랑하고 싶은 간절한 갈망이 있다. 하지만 육체와 시간 속에 갇힌 우리가 어떻게 영원한 영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그리스도는 '와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지만, 사실 이보다 더 불균등한 관계는 없었다. 그분은 완전하신 분이셨다. 그분이 아무리 우리 인간과 동등됨을 취하셨다 할지라도, 적어도 우리에게 있는 '원죄'는 없으셨다. 즉 우리가 아무리 그분을 좇는다 해도 출발선이 다르다. 그러나 주님 따르는 것을 조건과 환경 탓으로 변명만 하고 있어서도 안 된다.
A. J. 러셀은 "모든 살아 있는 교회의 이야기는 영성을 추구하는 지속적 싸움의 이야기"라고 썼다. 그런데 과연 오늘날 교회는 '싸움'보다는 '은혜'에 집착하는 듯 하다. 그러면서 '영성'이 '달란트(기능적 은사)'로 국한되거나, 체험적 신앙이 영성으로 둔갑되는 현상들을 직면하고 있다.
고전의 지혜는 적인가?
본서는 일부 개신교가 터부시하거나 경계하는 '요한 클리마쿠스', '십자가의 요한', '아빌라의 테레사', '윌리엄 로', '존 오웬', '프랑수아 페넬롱', '프란시스 드 살레', '헨리 드러몬드', '질 송' 등이 등장한다. 경계하는 이유는 이들이 '수덕 신학'을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로마가톨릭의 이단적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칭의의 관점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성화의 관점에서 이들의 가르침은 충분히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부분들이 있다.
굳이 왜 이런 사람들의 글을 읽느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을 반대하는 분들 중 과연 이들의 글을 읽어보고 반대하시는 분들은 몇 분이나 될까? 만약 종파적 이유 때문이라면 일단 흥분을 가라앉혀야 한다. 필자는 아이들과 진화론을 두고 토론을 한다. 또 청년들과 함께 공부하다 보면, 청년들이 읽은 책들(주로 자기계발서거나 일반 인문서적이다) 중에 이들의 글들보다 더 심각한 사상적 배경을 둔 책들이 훨씬 많다.
시중에 읽히는 자기계발서나 소설 등을 읽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면, 적어도 위 저자들은 기독교 고전에 해당하는 자들이다. 독서의 폭을 '세 명의 존'-존 칼빈, 존 맥아더, 존 파이퍼-으로 제한하고 싶은가? 필자는 이들 세 명 모두 존경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추구한다면, 기독교 고전을 무시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 비록 그들이 그 시대적 한계와 지적 편향성, 신앙적 혼선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매일 안방에서 보는 드라마보다 훨씬 신학적으로나 신앙적으로 건전하다. 우리는 그들을 통해 충분히 도움을 받는 것을 금하지 말아야 한다.
영적 스승
요즘 교회 생활은 마치 한 명의 의사가 진료실 한 곳에서 1천 명의 암환자를 모아놓고 똑같은 조언을 내놓는 것 같다. 그 중에는 식도암 환자도 있고, 폐암 환자도 있고, 간암 환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 똑같은 강의, 똑같은 정보, 똑같은 적용을 듣는다. 그리고 그들은 그럼에도 성령님이 역사하시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어야 한다.
초대교회 방식은 그렇지 않았다.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 디다케>는 초대교회가 새신자들을 훈련할 때 입문서로 사용한 기독교 고대 문헌이다. 거기에 보면 스승과 제자의 일대일 관계가 전제되어 있다. 전도에 비해 양육에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프란시스 드 살레는 자신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쪼개면서 개인들을 섬겼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고백컨대 영혼을 개별 지도하는 일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이 고통은 추수기와 포도 수확기에 일꾼들이 느끼는 것과 같은 위안을 가져다 준다. 일이 산더미 같고 짐이 심히 무겁지만, 그들에게 이때보다 더 즐거운 때는 없다."
오늘날 영성을 지도해 줄 개인적 스승을 찾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핑계만 대고 포기해서도 안 된다. 자기 목적과 욕망의 성취가 아닌 진정으로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있다면, 본서를 그 시작점으로 해 보기를 권한다. 본서 한 권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거나 의존하라는 말이 아니라, 기독교 고전을 개인적 영성의 형성과 향상을 위한 출발점으로 삼기에 본서가 충분하다는 것이다.
영적 여정
고대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생활과 영적 성숙을 '여정(성화의 과정)'으로 보았다. 또한 그들은 개인의 특성과 상황에 맞춰 영혼을 인도하고 양육해야 함을 알았다. 수도자 요하네스 타울러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성숙이 얼마나 느린 과정인지에 대해 아래와 같이 언급했다.
"인간은 40세가 되기 전에 결코 지속적 평안에 이르지 못하며, 아무리 노력해도 진정 하나님을 닮은 모습으로 빚어질 수 없다. 그때까지 인간은 잡다한 것에 사로잡혀 본능의 충동대로 여기저기 휩쓸려 다닌다. 하나님의 지혜를 받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다른 것들에 지배당하고 있다. 그 나이에 이르지 않고는 참되고 온전한 평안을 얻을 수 없으며, 하나님을 보는 삶 속에 들어설 수도 없다."
혹자는 위의 글을 읽으면서, 성령의 역사를 의존하지 않고, 자의로 이루려 한다고 판단하고 싶을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 우리가 마음문을 열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시는 것처럼, 우리의 삶과 시간 속에 그분을 영접할 때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신다. 그분이 들어오셨다 할지라도 그분의 음성에 따르지 않거나 관심을 집중하지 않고 그분을 팽개치고 살아간다면, 성화와 영적 성장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물론 구원과 성장은 다르다. 하지만 갓난아이와 같은 구원은 역설적이게도 수치스러운 구원이라고 청교도들은 언급했다.
영적 기후, 영적 지형
영적 기후란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환경을 말한다. 고전은 다섯 가지 주요 기후를 언급한다. 가정, 직장, 친구관계, 교회, 내면의 사고이다. 불신 남편을 둔 여성도와 믿는 남편을 둔 여성도의 가정 안의 영적 기후는 다르다. 그러므로 성도들을 명제적이거나 당위적으로 지도할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의 영적 기후를 살피면서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지도해야 한다.
영적 지형은 우리가 걸어가는 길이다. 영적 기후가 아무리 좋아도 길이 험해지면 영적 삶이 영향을 받는다. 예컨대 사업이 망하거나, 실직을 당하거나, 중병에 걸리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을 당한 경우 등이다. 하나님은 우울증 약물을 복용해야 하는 사람이 죄에서 도파민이 충분히 생성되는 사람보다 기도하기가 훨씬 어렵다는 사실을 아신다. 즉 그들에게 믿음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이 회복될 수 있도록 선한 이웃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를 제대로 섬기려면 이러한 영적 기후와 지형들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그들을 판단할 것이 아니라 바르게 지도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한국에서는 영적 지도에 대해 불가피한 관심이 앞으로도 계속 증가할 것이다. 성도들은 실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느끼고 싶어하고, 하나님과 함께하고 싶어한다. 이러한 것에 대해 체험을 추구하는 신앙은 잘못된 것이라 책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에 대한 격려와 도움 그리고 바른 지도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욱 더 이론적 신학과 '체험 신학'에 대한 연구들이 활발해질 필요가 있다(서두르지 않으면 영성도 심리학에 빼앗긴다). 안셀름 그륀은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추구하는 것을 '아래로부터의 영성'이라고 표현했다. 즉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적 선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부터의 영성이며, 인간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구하고 찾아가는 것을 아래로부터의 영성이라고 명명했다.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다고 비판을 많이 한다. 그러나 위로부터의 영성은 신앙과 현실을 분리시키는 또 다른 영지주의(이성적 신앙)를 양산할 위험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육신을 통해 이 세상에서 삶으로 증거하고 나타내는 존재이다. 즉 성육신의 연장이 바로 교회의 존재 이유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말씀을 삶으로 나타내야 하며,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느끼고 체험하는 것들에 대해 바른 분별이 필요하다. 분명 이성의 왜곡이 있듯 정서와 체험의 왜곡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경계하고 회피할 것이 아니라 더욱 더 바른 분별과 성장을 위하여 적극적인 연구들이 필요하다. 본서는 그러한 노력의 결과물이며, 개인의 영적 성장(공동체적이지 않다고 비판하지 말라)을 위한 훌륭한 발판으로 손색이 없다.
/강도헌 목사
크리스찬북뉴스 운영자, 제자삼는교회 담임, 프쉬케치유상담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