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민 목사(팰리세이드교회)
김성민 목사(팰리세이드교회)

수년 전 사슴이 매일 지나다니는 길목에 살 때의 일이다. 하루는 아래층에서 설교를 준비하고 있는데, 창밖으로 사슴 두 마리가 언덕 밑에서 올라왔다. 그리고 내가 있는 줄 모르는지 창문 옆에 두 마리가 멈추어 섰다. 한 마리는 어미 사슴이고 또 다른 한 마리는 새끼였다. 곧 어미 사슴이 새끼 사슴을 혓바닥으로 핥기 시작했다. 어미가 새끼를 핥는 것을 이전에 본 일이 있어서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그날은 새끼 핥는 것이 매우 특별했다.

먼저는 거의 20여분을 넘게 오랫동안 핥았기 때문이다. 웅크리고 숨어서 보는 내 두 다리에 피가 잘 통하지 않아 무감각할 정도였다. 또 다른 한 가지는 너무나 정성스럽게 핥고 있었다. 얼마나 정성스럽게 핥는지 새끼 몸의 한 부분만이 아닌 몸 전체를 핥는데, 보기에도 너무나 사랑스럽게 핥았다. 그 모습이 너무나 위대하게 보일 정도였다. 웬만하면 돌아서 나의 일을 계속 했을텐데, 혹시 놀라서 새끼 핥아주는 일을 멈출 것 같아 계속해서 몰래 지켜보았다. 결국 충분히 핥아주고는 가던 길을 찾아 집을 지나갔던 일이 있었다. 그 일이 가끔 생각 날 때면 요즘도 만나는 길가의 사슴들이 귀하게 여겨진다.

그 어미 사슴이 새끼를 정성스럽게 핥아 준 이유가 무엇일까? 맛이 있어서 그렇게 했을까? 아니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좋은 기분 때문이었을까?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오히려 깨끗지도 않고 그리 부드럽지도 않은 새끼 사슴의 온몸을 핥고 나면 며칠 동안 혓바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본능일 것이고, 그 본능은 인간으로 말하자면 사랑일 것이다.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고, 청결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며, 잘 자라게 하고자 하는 본능 일 것이다. 어미의 책임이라고 여길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 본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도, 또한 한 것도 없지만 언약의 하나님은 구원을 선물로 주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이다. 마치 새끼 사슴이 아무것도 알지 못하여 그냥 서서 있을 때에 어미가 핥아 주었던 것 같은 사랑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생명을 얻고 늘 건강하게 사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아니라면 천국에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한일서 4장 9-10절)라고 성경은 증거한다.

한편으로 그 어린 사슴이 부러웠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그 어미 사슴의 사랑 정도가 아니지 않은가? 그 사랑을 어떻게 Happy Holidays와 바꿀 수 있겠고, 비싼 선물과 바꿀 수 있겠는가? 어떻게 술과 춤 파티(Party)와 바꿀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를 핥아 주시되 가장 더러운 죄까지도 지고 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랑이 지금도 성령님으로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나를 위로하시고,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매일이 성탄절임을 깨닫게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