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효 목사
장재효 목사(서울 성은교회)

사람이 왜 태어나는지, 그리고 무엇을 위해 살다가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창세 이후로 땅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의 가장 큰 궁금증이었습니다.

이 세상은 한 번 살 수밖에 없는 인생의 쇼하는 무대라고들 합니다. 자기 인생의 각본을 따라서 제멋대로 쇼하는 것이 세상무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쇼를 잘 했을 때는 박수와 대접을 받을 수 있겠지만 쇼를 잘 못했을 때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욕을 듣고 원망과 심지어 행패까지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인생은 원맨쇼로 살수 없다는 것이 입증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人)을 한문으로 보면 상형문자로 혼자서 살수 없고 서로 의지하고 살 수밖에 없다는 의미로 만들어졌습니다. 창세기1:26이하에서 보면 사람은 원래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어졌는데,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셔서 생령이 되었다고(창2:7) 밝히셨고 창1:36 이하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는데, 그 모든 것을 마지막에 만드신 사람에게 위임시켜 주셨습니다.

천하만물 우주공간에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말씀의 권능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창조라고 하는 것은 없었던 것을 있도록 만들어 낸 것을 말합니다. 이 모든 피조물이 인간에게 관리가 의탁되어졌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세기1:26)

이 모든 것이 인간들의 다스림으로 위임되어졌었는데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그것들을 얻어서 먹고 살자고 그것들에게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주인이 오히려 과거 하나님으로부터 넘겨받았던 소유권을 다시 얻기 위하여 종살이를 하게 된 오늘의 현실이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1. 하나님의 계획(計畫)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보내신 세례요한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게 되고 예수님에게는 성령이 충만히 임하셨습니다. 어느날 세례요한이 그의 제자 요한과 안드레와 함께 섰다가 예수님의 다니심을 보고는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가기를 권합니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좇습니다.

요한복음 1:38에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선생님 어디 계시오니이까”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와 보라” 나를 따르고 나를 본받으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이 그날 예수님을 따라가서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 함께 밤을 지내게 됐습니다. 하루 밤을 같이 지내면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과 또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가 확실하게 알아보게 됐습니다. 이튿날 날이 새기 바쁘게 안드레가 자기 형제 베드로를 찾아가서 “우리가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이 보내주시라 했던 그분을 만났다”하고 베드로를 전도해서 데리고 갑니다. 그런데 안드레가 베드로를 내 형님이고 시몬이라고 소개하기도 전에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니 이름을 이제 바꾸어 게바라 하라”(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베드로란 말은 영어로 Peter라 해서 반석이라는 뜻입니다)하십니다. 이 이름이 베드로를 통해서 이 땅 위에 예수그리스도의 교회가 최초로 세워지게 되는 것을 예언하시는 말씀입니다. 시몬을 동생 안드레가 전도하여 와서 소개도 시켜 드리지도 않았는데 예수님은 시몬을 알아보셨습니다. 심지어 그에게 새로운 이름으로 개명까지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반석 위에, 즉 너의 정통한 신앙고백을 반석으로 내 교회를 이 땅위에 세우겠다고 하십니다. 또한 요한복음 21:15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하시면서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가 어떻게 순교 당하여 죽게 될 것을 미리 일러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베드로의 남은 평생은 이미 예수님의 각본에 따라 계획이 되어져 있었고 그대로 살다가 순교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의 설계는 내가 세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이 어머니 뱃속에 생겼을 때부터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오는 과정에 내가 내 인생을 내 멋대로 설계하고 추진도 하고 노력도 해보았지만 거기서는 자기 자신이 자기 인생을 만족하게 할 수도, 원하는 뜻이 이루어지는 성공을 기대할 수도 절대로 없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부모님을 통하여 생기게 하심으로 생겼고 태어나게 하심으로 태어났습니다. 내 인생의 스케줄을 하나님이 짜시는 것입니다. 그걸 일찍 깨달아서 그 하나님의 스케줄에 들어가서 맞추고 살면 그 인생은 하나님이 성공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2. 나보다 나를 더 잘아시는 주님

43절에 보면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시려 하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하십니다.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동네 갈릴리 동북 해안에 있는 작은 동네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빌립이 나다나엘이라는 자기 친구를 찾아가서 전도하게 됩니다.

빌립은 예수님이 알아지고 믿어지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런 빌립이 자기의 가장 친한 친구 나다나엘에게 찾아가서 모세가 율법에 기록했고 즉 예언이 되어 있고 여러 선지자가 예언한 그분을 우리가 만났는데 요셉의 아들 나사렛동네의 예수더라고 소개를 했는데 잘못된 부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출신이 아니고 베들레헴 출신입니다.

그런데 나사렛사람이라고 하니까 나다나엘이 듣더니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합니다. 구약성경 미가서 5장에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 그리스도는 나사렛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게 예언되어 있다는 사실을 나다나엘은 알고 있었습니다. 이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합니다.

빌립이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짧아서 전도 밑천이 모자랐습니다. 그러니까 그 친구를 어떻게 설득시킬 수가 없어서 가장 마지막 전도 방법은 “한번 와 보라”였습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고 말씀하시니 나다나엘이 당황해서 “선생님 어떻게 저를 아십니까?”하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빌립이 너를 데리러 가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을 때 내가 너를 보았노라”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양성(兩性)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몸을 가지고 계시니까 인성이 있으시고 또 하나님의 아들로 신성도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말씀하시는 것은 인성이고 나다나엘이 6개월 전에 날이 더워서 무화과나무 그늘에 앉아서 망한 나라 이스라엘을 빨리 독립시켜 주시기를 하나님께 울며 기도한 사실을 알고 하신 말씀은 영성으로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십니다.

3.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의탁(依託)

로마제국주의 압제 하에 식민지 백성으로 살던 이스라엘은 인권을 유린당하고 노동력은 착취당하는 생활 속에서 참으로 살맛이 없었을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고 지존자의 뜻을 무시하며 짓밟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회개할 수밖에 없도록 고통에 몰아붙이시는 겁니다.

만약 이스라엘과 같이 여러분이 견디기 어려운 고통에 몰려가게 되면 스스로 하나님 앞에 잘못 저지른 죄 값을 회개하라고 강하게 고통을 주시는 것으로 깨닫고 서둘러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용서 받으면 하나님의 방법으로 급속도로 회복시켜 주시는데 절망은 소망으로, 실패는 성공으로, 죽음은 영생으로 바꾸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주권자이십니다.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시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께 여러분의 인생을 의탁해 보십시다.

“믿음으로 살면 너의 가는 길에 장애물을 내가 평탄하게 하고 형통하게 내가 책임지고 보살펴 주리라”(수1:7~9)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일꾼으로 쓰임받기 위해서 살 때 하나님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리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누구보다도 여러분들을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예수님을 믿음으로 여러분의 인생을 가장 성공적인 인생으로 새 출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