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장신대 김인수 총장
김인수 목사(전 미주장신대 총장)

전회에서 기술한 초기 한국 선교사들의 연합 사업은 다양한 분야에서 이어졌다. 그 중 괄목할 만한 사항은 지역분할과 교인 교환이다. 여러 선교부들 간에 맺은 예양협정(禮讓協定:Comity Plan)에 따라 1905년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는 선교 지역을 분할했다. 북장로교회는 서울, 경북, 황해, 평안도 지방을, 남장로교회는 전라도 지방을, 캐나다 장로교회는 함경도 지방을, 호주 장로교회는 경남 지방을, 북감리교회는 강원도 원주 지방, 충청도, 황해도 일부, 평양 지방을, 그리고 남감리교회는 강원도 지방을 맡아 선교하기로 합의했다.

지역 분할이 끝난 후 그 지역 내의 교인들을 바꾸기 어려운 일이 남았다. 교인을 바꾼다는 말은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각각 새로 정해진 구역에 따라 본래 감리교인이 장로교 구역에 있으면 장로교회로, 본래 장로교인이 감리교 구역에 있으면 감리교회로 교회의 적을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남장로교회와 북감리교회와의 예양협정에 따라 1908년에 북감리교회가 일하던 전라북도 지역은 남장로교회로, 남장로교회가 사역하던 충청남도 지역은 북감리교회로 넘겨주었다.

그러나 교인들을 바꾸는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아직 한국 교인들은 믿음이 성숙하지 못한 상태였고, 또 지역 분할이니, 교인 교환이니 하는 것을 생소한 사안을 이해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난주까지 장로교회에 나가던 교인더러, 다음 주부터는 감리교회로 가야한다고 말하면 교인이 그것을 순수히 받아들이기가 쉬운 일이겠는가?

그러나 이 일은 한국 교인들의 적극적 호응 속에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약 1만 2천 명 교인이 아무 문제없이 교환됐다. 한 선교사는 이것을 보고 “양쪽에서 아름다운 일치의 정신을 보여 주었는데, 그것은 희열이 가득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다.”라며 감탄했다. 이 일에 대해 감리교의 해리스(M.C.Harris) 감독은 다음과 같이 그의 놀라움을 피력했다.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7선교회는 철저하게 그리고 가장 우호에 넘치게 서로 이해하면서 일하고 있다. 지난 가을 한국에서 새로 조정된 교구 경계에 따라 장로교와 감리교 사이에 수십 개의 교회가 그리고 수천의 교인들이 서로 바꾸는 일을 하였는데 이 일은 그 어느 기독교 국가에서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이 일은 아무런 위신의 손상 없이 한국 교회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연합 정신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목적을 강조하는 실제적 이득을 성취했다. 한국은 이제 다른 교회들 간에 경쟁을 하는 낭비 없이 최대한의 효율성으로 교구 일들을 수행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 일에 대하여 테일러 (Miss Taylor) 양은 놀라움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상상을 해보시라. 만일 미국에서, 아무런 사전 협의도 없이 또는 그 문제에 관하여 교인들의 의사를 묻는 투표도 없이, 다만 총회의 결의에 의해서 전국의 모든 장로교인들을 다른 교파로 넘긴다고 하는 결의를 했다고 한다면, 그것이 아무리 좋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얼마나 엄청난 혼란이 일어날 것인가 하는 것을……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승리의 행진이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모든 이유들을 깨끗이 소멸해 버렸다. 한국의 교회는 확실한 진리의 기초,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 있다.”

선교지 분할과 교인 교환은 한국 초기교회사의 가장 빛나는 에큐메니칼 정신의 구현이다. 이런 연합정신은 세계 그 어떤 선교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쾌거이고, 한국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앙 표현 중 하나다.

그러나 이 복음주의 선교협의회는 7년 후 장로교회가 총회를 창설하자 이름을 ‘제너럴 카운슬’(General Council)에서 ‘페더럴 카운슬’(Federal Council)로 바꾸었고, 단일교회 형성이라는 목적도 빠지게 됐다. 협의회는 1940년까지 지속됐고, 실제적 협력으로 출판위원회를 통한 찬송가 통일, 정부관계, 어학학교, 사회봉사 사업, 기독교 절제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한국선교지」(Korea Missions Book)와 「코리아 미션 필드」(The Korea Mission Field) 등을 발간했다.

또 다른 연합사업은 성교서회(聖敎書會) 설립이다. 선교사들은 선교 초기에 시급하게 처리해야 할 문제 가운데 하나가 문서 선교를 위해 성교서회를 설립하는 일이라 여겼다. 1888년 언더우드는 조선성교서회(The Korean Religious Book and Track Society) 설립을 제안했다. 이듬해 10월 창설 준비 모임을 가졌고 1890년 6월에 헌장을 채택하고 정식으로 조직을 갖추었다. 그는 재정 지원을 위해 토론토문서전도회, 미국문서선교회 그리고 런던문서선교회에 지원을 호소했다. 이 기관들이 자금 지원에 동의하여 1889년에는 비록 그 기관들로부터 정기적인 지원을 받는 것이긴 하지만, ‘죠선성교서회’가 자체 관할권을 가지고 조직될 수 있었다. 이 일은 제7일 안식일 교회만 제외하고 한국에 나와 사역하고 있는 모든 선교회가 동참했다.

서회 회장 올링거(F.Ohlinger), 부회장 헐버트(H.B.Hulbert), 연락 간사 언더우드(H.G.Underwood), 기록 간사 스크랜톤(W.B.Scranton), 회계에 펜윅(M.Fenwick) 등이 선출됐다. 서회 자금은 주로 한국 교회와 선교사들이 충당했다. 몇 년 동안은 자체 건물도 없었고 간사에게 보수도 지불하지 못했지만, 조선성교서회는 교회의 성장과 더불어 날로 번창해 나갔다.

이 서회는 한국에서 선교하는 모든 선교회가 쓰는 문서를 관장했다. 또한 일어, 중국어, 영어로 된 책들을 수입하는 일도 맡았다. 서회는 연합찬송가를 출판하고, 연합교회신문, 주일학교 공과 등을 한국어로 출판했다. 영어로는 「코리아 미션 필드」를 월간으로 출판했다. 따라서 이 성교서회는 모든 선교회들이 참여하여 협력함으로써 선교 사역에 있어 협력의 본을 보여 주었다. 이 기관은 1919년에 이르러 기독교서회(Christian Literature Society)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