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효 목사
장재효 목사(서울 성은교회)

1. 성도의 참된 즐거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왜 즐거움이 됩니까? 쉽게 설명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은 택함 받은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 후에 예수님의 남은 뜻인, 영혼 구원을 목적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면,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죄인들에게 수모와 행패와 침 뱉음을 당하셨습니다.
또한 십자가의 형틀에 못 박히고, 피 흘리고, 다 이루었다는 말 한 마디 남기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생애 전체가 신적작정에 의해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택하신 백성들의 죄를 영원히 대속하시는 희생양으로서 죽음을 당하셔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죽음이 예수님의 끝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예수님을 약속대로 살리셨습니다. 그것도 생명부활의 첫 열매가 되게 하시고, 하늘나라 보좌우편에 앉으셔서 아버지와 더불어 세계를 지배하시게 하셨습니다.

또한 장차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역사가 종말을 맞이하게 될 때 예수님은 만왕의 왕의 자격을 가지고 재림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우십니다. 그 때 우리는 예수님의 백성이 되어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신령한 몸으로 주님과 더불어 영생복락을 누리게 됩니다. 영원히 사는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 즐거움을 위하여 우리도 그리스도의 남은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한 목적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데 따르는 의무를 감당하고 철저한 사명감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우리 삶의 목적을 예수님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영광스러운 백성으로 영원히 같이 살 때에 얻을 수 있는 즐거움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성도만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기를 기뻐할 수 있습니다.

2. 성도가 당하는 불시험의 이유: 연단

1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오는 시련은 우리의 영적소속에 대한 마귀의 핍박이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본문에서는 “불시험”이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불로 시험하는 것입니다. 오순절 이후 사도들에 의해서 예루살렘 교회가 기하급수적인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첫 순교자로 일곱 집사님 중에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리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교회에 박해를 가합니다. 그 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이유로 화형을 당하게 됩니다. 화형을 당할 때에 불기운이 연기와 함께 숨통을 막아오지만 그들은 마지막 숨 끊어지는 순간까지 찬송을 불렀습니다. 순교자들은 찬송하는 모습을 통해 천국과 내세 소망을 입체적으로 증거 했습니다. 이것이 불시험입니다. 그런 믿음의 순교자들이 우리의 신앙선배가 되셨기에 복음은 땅 끝까지 힘 있게 전파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런 불시험을 “시련”이라고 합니다. 죽이려는 의도가 아니라 시련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더 온전한 자격을 갖추어 지도록 연단시키시는 것입니다. 죽이려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흠도 티도 주름 잡힌 것이 없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주 순결하고 온전한 영적인 자격을 갖추게 하시려고 불로 시련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예로 다니엘 3장에 등장하는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왕궁의 교육을 받고는 왕의 행정에 참여하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질투로 인해 그들은 위기에 빠집니다. 두라평지에 세운 우상에 절하지 않는 자는 풀무불에 던지기로 하는 왕의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잘 생각해야 할 것은, 이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서 잠정적으로 허락하신 상태였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바벨론에게 망했을지라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믿음의 유대인들과 함께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박해로 인해 노예로 신음하고 멸시와 고통 중에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겪은 사건은 신앙의 각성제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우상 앞에 절하는 것을 거부함으로 평소보다 칠 배나 더 뜨거운 불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 불꽃 가운데 함께 들어가셔서 그들을 생명싸개로 덮어서 불꽃이 그들을 그을리지 못하도록 그들을 지켜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잠정적으로 허락하심으로 하나님께서 만유의 통치자 되심을 이방인 느부갓네살로 하여금 고백하게 만드시는 것이었습니다.

3. 성도의 복: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

그러므로 13절에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하십니다. 아무 잘못한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핍박을 받는다면 이를 즐거워하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나와 같은 죄인에게도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할 기회를 주신 것 자체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나를 보실 때에 내가 예수님께 속한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셨다는 것의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도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훗날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영생복락에 들어갈 때에 영원한 보람과 기쁨과 즐거움이 될 것입니다. 이를 두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난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고, 불시험을 당한다 할지라도 믿음의 정절을 지키면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해 주십니다. 그를 하나님께서 다 쓰실 때까지 살리시고 더 나은 길로 인도 해주십니다.

하지만 반대로 15절의 말씀처럼, 세상 사람들의 일에 괜히 참여하다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다가 얻어터지고 고난당하는 것을 핍박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자신의 죄 값에 대한 당연한 보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9절에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찌어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선을 행하는 가운데 우리의 영혼을 조물주 되시는 하나님께 신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길 자원하는 열심을 가지고 고백해야 합니다.

‘이 목숨 원하시면 기꺼이 주님께 드리겠습니다.’ ‘주님 마음대로 쓰시고 주님 뜻대로 하시옵소서.’

우리의 사는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잘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우리 모두 예수님의 남은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기를 힘쓰는 성숙된 성도, 의리와 인격을 갖춘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