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어린 시절 우리 집은 참으로 가난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집은 항상 외가댁 근처를 맴돌며 살았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나는 외가를 자주 드나들게 되었고 집안에 일이 생기면 한동안 할머님 집에서 학교를 다니곤 했었다. 할머님은 많은 손주들 중에서도 나를 상당히 이뻐해주셨다. 그 많은 심술을 다 받아주셨기에 할머님만 보면 땡깡을 부리는 것이 나의 취미였을 정도이다. 할머니는 내가 땡깡을 부리면 항상 데려다가 맛있는 것을 사주시거나 만들어주셨다. 다른 손주들도 많았지만 내 생일이면 반드시 손수 수수팥떡을 해주셨다. 그리고 할머님이 삼촌들을 따라 멀리 이사를 가셨어도 내가 할머님 댁에 가는 날을 정하여 꼭 오라고 하셨고, 내가 가는 날에는 할머님은 삼촌들이 사다주신 것들을 아껴 놓았다가 주시곤 했다. 그렇게 나는 할머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살았다.
그런데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던 때에 우리 집은 남미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 물론 할머님은 한국에 삼촌들과 남아 계시고 말이다. 참으로 슬펐지만 새로운 세계로 간다는 마음에 할머님과 헤어지는 슬픔을 감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 집은 남미로 이민을 가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우리 집은 전통적으로 불교집안이었고, 어머니 또한 할머님을 이어서 불심이 강하셨다. 그래서 아침이면 목욕재계를 하시고 독경을 하셨다. 그러니까 나는 어려서 독경을 들으면서 컸다. 그리고 희한하게 내가 다녔던 중학교도 불교적인 학교였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불교가 우리종교라고 생각하며 컸다. 그런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니 할머님에게는 충격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든다.
이민가서 바쁘게 세월이 흘러서 우리 집은 다섯 나라를 이민 다니며 살다가 미국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할머님도 뉴욕으로 초청해서 몇 달을 함께 지낼 수 있었다. 그 때 나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신학대학을 다니다가 뉴욕에 부모님이 오셔서 일을 도우러 왔던 때였다. 너무나 반가운 할머님을 만난 나는 할머님과 한 이부자리에서 자며 옛정을 나누었다. 그러나 나는 다시 신학을 하러 로스앤젤레스로 가야 했는데 아버지의 반대에 심하게 부딪치고 있었다. 아버님은 내가 좀 더 아버님을 도와 일을 해주기를 바라셨지만 나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서 아버님과의 의를 깨면서까지 로스앤젤레스로 가야했다. 나는 뉴욕을 떠나면서 굶더라도 반드시 신학을 마쳐서 목사가 되겠다는 결단을 한 상태였다. 그런데 내가 뉴욕을 떠나려고 하던 전날 밤이었다. 할머님은 잠자리에서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 종식아, 나, 너 따라가서 로스앤젤레스에서 살면 안 될까? 한국 가기 싫어. 마음 같아서는 당장 모시고 가고 싶었지만 나의 형편이 할머님을 모실 처지가 아니었다. 당장 가서 살집조차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렌트비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할머님을 뒤로 한 체 로스앤젤레스로 향하게 되었다. 그것도 할머님이 우시면서 주머니에 찔러주는 돈 백 불을 가지고 말이다.
그 이후로 나는 할머님을 다시 만날 수 없었다. 할머님은 한국으로 돌아가셔서 얼마 있지 않아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나는 할머님의 사망 소식을 들으며 통곡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실 때 보다 몇 배는 더 울고 울었다. 그리고 지금도 할머님만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그 이유는 할머님은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나는 내 앞길 가기 위하여 할머님을 외면한 것이 너무 후회가 된다. 내가 굶더라도 할머님 모시고 살면서 교회에 모시고 나갔다면 나는 오늘 같이 슬퍼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기회는 없다. 기회가 없어서 울게 된다. 이번에 교회에서 40일 새벽 부흥회시에 요한 계시록을 강해하며 그 좋은 천국을 대하고, 그 무시무시한 지옥을 대하면서 나는 또 할머님 생각에 울고 말았다. 나의 사랑 나의 할머님… 어찌할까…지옥에서 외치는 그 소리… 어찌할까… 나는 나의 가슴을 쥐어뜯으며 또 울어야 했다.
그런데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던 때에 우리 집은 남미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 물론 할머님은 한국에 삼촌들과 남아 계시고 말이다. 참으로 슬펐지만 새로운 세계로 간다는 마음에 할머님과 헤어지는 슬픔을 감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 집은 남미로 이민을 가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우리 집은 전통적으로 불교집안이었고, 어머니 또한 할머님을 이어서 불심이 강하셨다. 그래서 아침이면 목욕재계를 하시고 독경을 하셨다. 그러니까 나는 어려서 독경을 들으면서 컸다. 그리고 희한하게 내가 다녔던 중학교도 불교적인 학교였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불교가 우리종교라고 생각하며 컸다. 그런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니 할머님에게는 충격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든다.
이민가서 바쁘게 세월이 흘러서 우리 집은 다섯 나라를 이민 다니며 살다가 미국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할머님도 뉴욕으로 초청해서 몇 달을 함께 지낼 수 있었다. 그 때 나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신학대학을 다니다가 뉴욕에 부모님이 오셔서 일을 도우러 왔던 때였다. 너무나 반가운 할머님을 만난 나는 할머님과 한 이부자리에서 자며 옛정을 나누었다. 그러나 나는 다시 신학을 하러 로스앤젤레스로 가야 했는데 아버지의 반대에 심하게 부딪치고 있었다. 아버님은 내가 좀 더 아버님을 도와 일을 해주기를 바라셨지만 나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서 아버님과의 의를 깨면서까지 로스앤젤레스로 가야했다. 나는 뉴욕을 떠나면서 굶더라도 반드시 신학을 마쳐서 목사가 되겠다는 결단을 한 상태였다. 그런데 내가 뉴욕을 떠나려고 하던 전날 밤이었다. 할머님은 잠자리에서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 종식아, 나, 너 따라가서 로스앤젤레스에서 살면 안 될까? 한국 가기 싫어. 마음 같아서는 당장 모시고 가고 싶었지만 나의 형편이 할머님을 모실 처지가 아니었다. 당장 가서 살집조차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렌트비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할머님을 뒤로 한 체 로스앤젤레스로 향하게 되었다. 그것도 할머님이 우시면서 주머니에 찔러주는 돈 백 불을 가지고 말이다.
그 이후로 나는 할머님을 다시 만날 수 없었다. 할머님은 한국으로 돌아가셔서 얼마 있지 않아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나는 할머님의 사망 소식을 들으며 통곡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실 때 보다 몇 배는 더 울고 울었다. 그리고 지금도 할머님만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그 이유는 할머님은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나는 내 앞길 가기 위하여 할머님을 외면한 것이 너무 후회가 된다. 내가 굶더라도 할머님 모시고 살면서 교회에 모시고 나갔다면 나는 오늘 같이 슬퍼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기회는 없다. 기회가 없어서 울게 된다. 이번에 교회에서 40일 새벽 부흥회시에 요한 계시록을 강해하며 그 좋은 천국을 대하고, 그 무시무시한 지옥을 대하면서 나는 또 할머님 생각에 울고 말았다. 나의 사랑 나의 할머님… 어찌할까…지옥에서 외치는 그 소리… 어찌할까… 나는 나의 가슴을 쥐어뜯으며 또 울어야 했다.
© 2020 Christianitydaily.com All rights reserved. Do not reproduce without permissi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