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석 선교사.

1) 무함마드의 생애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는 아라비아반도의 메카에서 쿠라이쉬(Quraish) 부족의 하심(Hasim) 가문으로 태어났다. 당시에 쿠라이쉬 부족은 메카의 카바(Kaaba)신전을 관리했다. 그의 아버지 압둘라(Abdullah)는 무함마드가 태어나기 전에 죽었다. 유복자로 태어난 무함마드는 맑은 사막의 공기 속에서 남자답게 성장하라는 쿠라이쉬 부족의 전통에 따라서, 태어난 지 7일 만에 사막에서 생활하는 베두인 여인 할리마(Halima)의 손에서 자라게 되었다.

그리고 6세의 나이에 집으로 돌아왔다. 무함마드의 어머니 아미나(Aminah)는 잘 자란 무함마드를 친정 식구들에게 보여 주기 위하여 그녀의 고향인 메디나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열병에 걸려서, 아브아(al-Abwa)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 후 무함마드는 조부(Abu al-Mutalib)와 함께 살았다. 양친을 잃고 고아가 된 무함마드에게 조부는 극진한 사랑을 베풀었다. 그러나 무함마드가 8세 때 조부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조부는 죽기 전에 무함마드를 자신의 아들이자 무함마드의 삼촌인 아부 탈립(Abu Talib)에게 부탁했다. 아부 탈립은 유언을 성실하게 지켰다.

무함마드가 12세가 되었을 때, 삼촌 아부 탈립은 그를 데리고 시리아로 무역을 떠났다. 그러나 삼촌의 무역은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따라서 계속되지 못했다. 무함마드는 가난한 삼촌의 집안일을 돌보면서 목동으로서 살았다. 삼촌 아부 탈립은 가난한 데다가 딸린 식구가 많았다. 그래서 무함마드는 목동보다 수익성이 높은 일을 찾아야 했다. 그러다가 25세가 되었을 때, 과부가 된 쿠와일리의 딸 카디자(Kadija)라는 여인이 쿠라이쉬 부족 가운데 집안의 사업을 위한 총무를 찾는다는 것이다. 무함마드 시대에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아라비아반도는 사막이었다. 이는 생존을 위하여 다른 지역과 무역을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메카의 상인들은 낙타들로 이루어진 대상을 파견하곤 했는데, 당시 가장 큰 낙타 대상들 가운데 하나는, 메카에서 가장 부유한 여인 카디자였다. 이슬람 역사에 따르면, 그녀는 무함마드의 충직하고 성실한 성품을 보자 그를 시리아로 가는 대상의 총무로 고용했다고 한다. 무함마드는 싣고 간 물건을 투자한 돈의 두 배 정도로 팔고 돌아왔다. 이에 카디자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당시 카디자는 마흔 살이 넘었고 네 번 이혼했으며 자녀도 있었지만, 무함마드에게 청혼했다. 사람들은 카디자가 무함마드에게 청혼한 이야기에 의심스러워하는 반응을 보이지만, 이슬람 역사에는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부유한 카디자와 결혼한 무함마드는 경제적인 여유를 갖게 됐다. 무함마드의 결혼생활은 무난했다. 그런 중 뜻하지 않은 일들이 벌어졌다. 무함마드는 카디자와의 사이에 두 아들 압둘(Abdul)·까심(Kashim)과 네 딸 자이납(Zainab)·루카이야(Rukaiyya)·움무칼숨(Um Kulthum)·파티마(Fatima)를 낳았다. 그런데 두 명의 아들이 어렸을 때 죽게 된 것이다. 당시에는 아라비아의 거친 사막을 배경으로 살아갔기 때문에 건강한 남자아이를 선호했다. 그러므로 무함마드에게 아들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었다. 또 두 명의 아들이 모두 어린 시절에 죽었다는 것이, 어떤 형태로든지 무함마드의 삶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무함마드는 두 아들의 죽음 이후에 진리를 찾고 싶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당시에 무함마드에게 진리를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대신 비잔틴 기독교 제국에서 쫓겨난 이단들만이 주변에 가득했다. 그는 일생 동안 정상적인 기독교인을 만나지 못했다.

그는 종종 메카의 북쪽으로 2마일 떨어진 히라(Hira)산 동굴에 은거하였다. 아랍인들은 라마단 기간이 되면 금식을 하였다. 무함마드가 40세가 되었을 때 금식 기간에, 히라산 동굴에서 하인이 날아다 주는 최소한의 양식으로 생활을 했다. 그가 잠이 들었을 때였다. 한 영(靈)이 종이를 들고 나타나 그에게 읽으라고 말했다. 무함마드는 깜짝 놀라며 "무엇을 읽으란 말입니까?"라고 말했다. 그리고 질식할 것 같이 세 번을 반복하더니 그 영(靈)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물을 창조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읽어라. 그분은 한 방울의 정액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노라. 읽어라! 그대의 주님은 가장 은혜로운 분으로서 연필로 쓰는 것을 가르쳐 주셨으니, 인간이 알지 못하는 것도 가르쳐 주셨노라"(꾸란 96:1-5) 무함마드는 그 구절을 따라 읽고 암송했다. 그는 자신에게 나타난 것이 귀신(진, Jinn)이라고 여겨서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한 극도의 공포를 느꼈다. 이때 무함마드는 자살을 시도하려 했으나, 알라의 사도로 임명한다는 음성을 듣고 멈추었다고 한다. 그는 떨리는 몸을 끌고 집으로 돌아와 카디자에게 담요로 자기를 덮어 달라고 했다.

그가 이전에도 종종 그런 적이 있어서, 카디자는 무함마드를 안정시켰다. 이슬람에 따르면, 무함마드가 계시를 받을 때 육체적인 고통이 수반됐다고 한다. 가끔씩 무함마드는 "취해서 땅에 떨어진 것처럼 느꼈으며 낙타 새끼처럼 신음했다"고 한다. 훗날 무함마드의 부인이 된 아이샤(Aisha)는 이렇게 서술했다. "알라의 선지자는 습관적으로 발병해서 추운 날에도 땀이 구술처럼 얼굴에 흘러 내렸다" 이 구절은 무함마드가 오랫동안 간질병이 앓지 않았나 의심하게 되는 부분인데, 그는 모든 계시를 정상적인 정신을 가지고 인식했던 것 같지는 않다. 그 당시 사람들은 무함마드를 제정신이 아닌 사람으로 취급했다.

심지어 꾸란에도 "그 때 그들이 말하더라 그대에게 꾸란이 계시되었다니 그대가 미친 자가 아니뇨?"(꾸란 15:6), "제정신을 벗어난 시인을 위하여 우리의 신을 포기해야 하느뇨?"(꾸란 37:36)는 구절도 있다. 카디자는 남편이 잠든 것을 보고 자신의 외사촌이었던 와라까 빈 나우팔(Waraqua bin Naufal)을 찾아가서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우팔은 메카에서 영향력 있는 종교 지도자였다. 그는 평소에 무함마드의 멘토 역할을 했는데, 그가 "무함마드에게 나타난 것은 모세에게 나타났던 천사"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더불어 "무함마드는 이 민족을 위한 예언자임에 틀림이 없다"고 말하였다. 카디자는 무함마드에게 가서 이 말을 전해 주었다. 곧 카디자는 무함마드의 최초 추종자가 되었다. 이슬람은 이렇게 시작됐다.

카디자는 결혼 후 25년 만에 죽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무함마드에게는 카디자 외에 다른 부인이 없었다. 카디자가 죽은 후, 무함마드는 6세의 아이샤(Aisha)와 약혼을 하였고, 그녀가 만 8세가 되었을 때 결혼했다. 이때부터 무함마드에게는 많은 부인과 여종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무함마드의 부인 가운데 두 명은 유대인이었고, 한 명은 기독교인이 되었다가 다시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무함마드의 부인 가운데 여덟 번째인 마리암(Maryam)은 이집트 콥트교회의 대주교가 선물로 보낸 두 명의 노예 가운데 한 명이었다. 무함마드는 그녀를 통하여 이브라힘(아브라함)이라는 아들을 얻었으나, 그 역시 병으로 죽었다. 가장 어렸던 부인이자 이슬람의 어머니로 불리는 아이샤의 증언에 의하면, "무함마드는 여자와 향수, 그리고 음식, 이 세 가지를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무함마드는 A.D. 632년 6월 8일 62세의 나이로 메디나에서 고열과 폐렴으로 죽었다.

2) 이슬람의 형성에 영향을 끼친 이단들

기독교인으로서 이슬람에 대하여 처음 연구하였던 사람은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에서 살았던 요하네스(Johannes)였다. 그는 자신의 신학적 저술인 『지식의 근원』 "제2부 이단에 관하여"에서 이슬람을 이단으로 간주했다. 그 이유는 "무함마드가 이단이었던 아리우스파 수도사에게서 정보를 받아서 이슬람이 시작되었으며, 꾸란에서는 예수님을 비록 알라의 말씀이자 영으로 언급하지만,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삼위일체에 대한 꾸란의 견해는, 당시에 아라비아 지역에서 영향력이 컸던 컬리리디아니즘(Collyridianism)이란 종파에 영향을 받았다. 이 종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하나님에게 어울리는 숭배와 경배를 마리아에게 드리는 등, 마리아를 여신으로 대우하는 것이다. 컬리리디아니즘이 5세기에 성행했던 지역이 공교롭게도 데메테르(Demeter)와 레아(Rhea) 같은, 그리스 여신들을 숭배하던 지역과 일치한다. 또한 예수님에 대한 꾸란의 묘사는 당시 아라비아 지방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본질상 도케티즘(Docetism)에 속한 많은 영지주의적 그리스도론의 영향을 받았다.

▲무함마드가 12살 때, 시리아 남부 보스라에서 만났던 부하리가 사역하던 수도원. ⓒFIM국제선교회 제공

이슬람에 의하면, 무함마드가 12살 때 시리아의 보스라를 방문했을 때 네스토리안(경교) 수도사 부하리(Buhari)를 만났다. 그 수도사는 처음으로 무함마드가 선지자임을 무함마드의 삼촌에게 알렸다. 그 후에 25세 때 카디자의 총무로 대상을 인도하던 무함마드는, 다시 네스토리안 수도사를 만나기 위하여 보스라를 방문했으나 만나지 못했다. 이는 무함마드가 네스토리안의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다. 또한 무함마드는 기독교 세력에 둘러싸여 있었다. 아비시니아(Abyssinia)는 단성론자(예수 그리스도가 단성, 즉 신성만을 갖는다고 함)들이였다. 갓산 왕조도 단성론자들이였다. 그런가 하면 무함마드의 부인 가운데 마리암은 이집트의 콥트교인이었다.

무함마드에게 영향을 끼쳤던 또 하나의 중요한 이단은 에비온(Ebionites)파였다. 이슬람에서 예수님을 선지자 가운데 한 명으로 평가하는 것은, 에비온파의 특성이다. 에이비온파는 그들만의 경전을 가지고 있었다. 에비온파가 초기 교회사에서 이단이 된 것은, 기독교와 유대교가 혼합된 종교였기 때문이다. 무함마드 당시에 메카에는 약 200-300명의 에비온파 신자들이 살고 있었다. 무함마드의 첫 번째 부인이였던 카디자(Khadija)는 에비온파 신자였으며, 무함마드에게 종교적으로 영향을 끼쳤던 와라까 빈 나우팔(waraqua bin naufal)은 카디자의 사촌으로서 에비온파의 사제였으며 메카에서 영향력 있는 종교 지도자였다.

이슬람의 교리의 구조는 기독교와 비슷하면서도 정통 기독교와는 다르다. 오랫동안 이슬람을 연구했던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이슬람에 대하여 명확한 결론을 내렸다. 장 칼뱅(J. Calvin, 1509-1564)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 3절을 주해하면서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는 배교자요, 이단자"라고 했다. 마틴 루터(1843-1546)는 기독교인들이 이슬람이 얼마나 해로운 종교인지 알고 그리스도 신앙 안에서 더욱 강건해지도록, 1542년 꾸란의 라틴어 번역에 찬성했다. 루터는 기독교의 반이슬람 논쟁자의 반열에 서 있다.

오늘날 전 세계 인구 가운데 약 16억이 무슬림으로 알려져 있다. 인류의 약 23.2%다. 한국에서도 1990년 이후에 이슬람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하여, 현재 약 25만 명을 넘었다. 2011년 통계에 의하면 한국인으로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사람도 71,000명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무슬림들 중 80%는 기독교의 진리에 대하여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또 다른 무함마드들이 진리를 찾아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으로서 이러한 이슬람의 증가를 간과하고 있을 수 없다. 따라서 한국교회도 이제부터는 늘어가는 이슬람 인구에 대해 선교적 관심을 가져야 하며, 동시에 참된 복음을 들어 보지 못한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유해석 선교사
FIM국제선교회 대표
'우리 곁에 다가온 이슬람'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