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의 딸 -하나님의 종이라는 이름 뒤에 감춰진 슬픈 가족사」라는 저서가 한국교회 뿐만 아니라 교계 안팎, 특히 합신총회에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모 원로목사는 추천서에 "매우 충격적인 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무척이나 가슴이 아픕니다. 잘 믿기지도 않습니다"라고 썼습니다. 책이 출간되기 전 원고를 읽으신 분이나, 추천서를 쓰신 분이나, 출판을 하신 분은, 출간을 멈추고 아래와 같은 말씀을 박혜란 목사에게 따뜻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권고했어야 했습니다.
1. 1950년대,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가장은 평범한 모든 가정에 있는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서 변해갑니다. 특히 성도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기까지 속사람이 자라갑니다. 장성한 분량으로 성장해갑니다. 75세의 딸이, 성품과 인격이 완성되지 못했던 젊은 시절의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이미 27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지금도 용서하지 못한 성도가 안타깝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으면서도 가슴에 맺힌 원과 한이 풀리지 않은 목사가 정말 안타깝고, 목사의 딸인 목사가 복음의 문을 막고 한국교회를 흔들게 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가정생활과 말씀을 전무하는 일을 조화롭게 삶에서 나타내는 것, 한 아내의 남편이자 자녀들의 아버지로 살아가는 일과 성도를 돌아보는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행하는 일에서 갈등을 느껴보지 않은 주의 종은 없습니다. 그래서 목사의 자녀들, 헌신적인 장로의 자녀들이 일탈을 하는 경우는 요즘도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녀들이 부모를 등지거나 믿음의 길을 벗어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돌아가시기까지 "나는 83년 묵은 죄인입니다(기록하는 본인이 들었던 말). 만물 중에 가장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라며 늘 인간의 죄성을 강조하고 어딜 가나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했습니다.
2. 손양원 목사를 우리는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존경하고 성자로 여깁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살해한 자를 아들 삼았기 때문입니다. 애통함이 없었겠나요? 하나님 말씀이 그러하니....... "원수도 사랑하라, 원수 갚는 것도 주께 의탁하라" 하시니....... 머리 조아려 울던 밤이 왜 없었겠나요. 그러나 손양원 목사님은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도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박혜란 목사가 지적한 대로 박 목사의 아버지는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에 운전병을 '용서'해야 했고, '신학교 경건회의 설교'를 미룰 수 없었습니다. 아내가 6남매를 두고 갔을 때, 그 남편·가장의 슬픔의 크기를 아는 자녀들은 없습니다. 배우자를 잃은 스트레스가 부모나 자녀를 잃은 것보다 더 심하다는 것은 의학적 상식에 속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나를 따르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모든 것을 버려 두고 따르는 결단이 필요했습니다. 세계 최초로 '성경전권 주석'이라는 큰 사명을 받은 '하나님의 종'이 어떠했을지 우리가 감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3. 한국어 번역 성경을 토대로 쓴 주석이라서 왜곡되었다고 하는데, 성경의 기록이 성령의 영감으로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성경 번역 역시 원어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시절이었다 해도 성령께서 주관하십니다. 미전도종족을 위한 성경 번역을 주관하시듯이 말입니다. 또한 요즘은 설교 중에 원어가 가진 의미를 부연하기는 하지만, 개역성경은 아직도 보수적인 교회들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박윤선 목사님이 원어와 여러 외국어에 능통하셨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4. 1880년대에 기복주의가 팽배한 우리나라에 복음을 주셨고, 박윤선 목사님은 1905년생입니다. 1970년대 초에 와서야 한국교회는 참된 경건과 율법주의가 구별되는 신앙의 자태를 갖게 되었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은혜 등을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으로 낮아지셨고, 젊은 학생들 앞에서는 겸손과 사랑으로 낮아지셨습니다. 기복주의를 철저히 배격하고 오직 말씀을 따르는 '바른 신학'을 외쳤고, 신행일치의 '바른 교회', '바른 생활'을 합동신학교의 설립이념으로 하고, 바른 신앙을 잃지 않기 위해서 기도에 힘쓸 것을 당부했습니다. 스스로도 '하나님의 종'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의 본을 보이고, 기도의 사람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이 합신총회 뿐 아니라 한국교회를 견고하게 세우는 중요한 일에 쓰임받은 '하나님의 종'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훼손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5. 박윤선 목사님은 1980년 합동신학원의 초대원장을 지냈습니다. 합신총회는 박윤선 목사님과 같은 개혁주의 신학 전통을 따릅니다. 박윤선 목사님을 비롯한 여러 경건한 교수님들의 가르침으로 시작한 합신은, 36회 졸업생까지 3천여명을 배출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의 신학에 대한 박혜란 목사 개인의 왜곡된 주장은 합신총회의 신학과 신앙에 대한 명예를 훼손하는 것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의 딸로서도, 또는 목사로서도, 개인이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정통보수교단의 신학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는 것은 지극히 두려워해야 할 일입니다.
박혜란 목사는 자신을 위해서 이제라도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이화주 사모에 대한 것입니다. 6남매를 거느리고 아내와 사별한 남자, 가정을 돌보지 않고 하나님의 일이 우선이던 무심한 남편에게 왔습니다. 세계 최초로 신·구약 성경전권을 주석하는 일을 맡기신 하나님 앞에서, 그 일에만 전적으로 삶을 투신했던 20여년 넘는 세월과 남은 평생 박윤선 목사님의 사역을 위해서, 이화주 사모는 헌신하고 희생했습니다. 박혜란 목사님은 1950년대 세계 최빈국이었던 대한민국, 그 가난하고 암울했던 시대에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을 갔고 미국 유학을 갔습니다. 그 뒷받침은 사랑을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그 시대의 아버지가 딸에게 줄 수 있는 최대의 사랑입니다. 미국 유학길 처음 학비를 마련해줬던 새어머니의 사랑입니다.
박혜란 목사가 아픈 기억들을 지우고, 그의 상한 마음이 치유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