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수 목사.
(Photo : 기독일보) 김범수 목사.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경 러시아의 하얼빈 역에 7발의 총소리가 들렸다.

네 발은 조선총독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그리고 나머지 다른 세 발의 총알은 수행비서관과 일본총영사 등을 향해 조선의 독립을 향한 의로운 방아쇠를 당겼다. 그 총을 가진 사람은 조선인 안중근이었다. 그는 현장에서 잡혔고, 옥고를 치르다가 1910년 3월 26일 사형을 당하면서 유언을 남겼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그 때 안중근 의사의 나이 30세였다. 안중근 의사는 대한민국을 사랑했다. 사랑했기에 자기 목숨을 대한독립과 바꾼 것이다. 그는 구차한 목숨을 구하지 아니하고 의로운 죽음을 선택했다. 그래서 그는 의사가 되었다.

지난 4월 그리고 지금 5월에도 우리는 눈물 젖은 가슴으로 살았다. 너도 울고, 나도 울고, 우리 모두 함께 울었다. 대통령도 울고, 아버지도 울고, 어머니, 그리고 가족 모두, 아니 대한민국의 모든 식구들이 다 울었다. 사랑했기 때문에 울었다.

그 어느 누구가 그 어린 생명들의 소중함을 보다 더 깊이 깨달았다면 이렇게 슬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보다 더 남을 생각하는 마음을 갖는 습관과 문화, 그리고 인격을 가졌다면 이렇게 아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독일의 수필가 안톤 슈나크(Anton Schnack)가 이런 글을 썼다.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게다가 가을비는 쓸쓸히 내리는데 사랑하는 사람의 발길은 끊어져 거의 한 주일이나 혼자 있게 될 때. 아무도 살지 않는 고궁(古宮), 그 고궁의 벽에서는 흙덩이가 떨어지고 창문의 삭은 나무 위에는 '아이쎄여, 내 너를 사랑했노라...'는 거의 알아보기 어려운 글귀가 씌어 있음을 볼 때....."

성경은 진정한 사랑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라고 했다. 사랑한다면 그 어떤 것도 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노래 할 수 있고, 일할 수 있고, 아플 수 있고, 배고플 수 있고, 죽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괭가리가 된다고 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어야 했던 이유는 많은 죄인을 살리려 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비참하고, 초라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예수님은 성인일 뿐 아니라 하나님으로 영광을 받고 계신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로마서5:18)

많은 아이들의 죽음과 함께 또 다른 의로운 죽음들이 있었다. 자신의 구명조끼를 학생에게 건네주면서 "나는 너희들 다 구조하고 나갈 거야!"라고 했던 박지영 안내원, 그리고 학생들의 구조를 돕고 선내에 남아 있는 학생들을 구하러 들어갔다가 배에서 나오지를 못했던 김기웅, 정현선 두 사람의 죽음은 잊을 수 없는 죽음이었다.

인생은 사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이다. 죽기 위해 사는 것이다. 날마다 닥쳐오는 상황 속에서 그 선택이 구차한 목숨이냐? 의로운 죽음이냐? 이 두 개의 갈림길에서 과감한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구차하지 않게 살도록, 의롭게 살도록 다짐을 해야 한다. 바로 이 5월은 구차한 목숨이 아니라 생명을 위해 의로운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을 기념하는 메모리얼(Memorial)의 날이 되기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