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래전 시카고에 와서 공부하던 유학생들의 이야기다. 꼬리곰탕이 먹고 싶었던 유학생들은 Grocery Market에 가서 소꼬리뼈를 거저 얻어다 끓여 먹을 수 가 있었다. 당시 미국사람들은 소꼬리뼈를 그냥 내버렸기에 소꼬리뼈가 필요하니 좀 달라고 하니까 쾌히 승낙하며 거저 내어 주었다. 그것을 가져다가 함께 자취하던 유학생 몇이 꼬리곰탕을 잘 끓여 먹었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한국서 유학생 몇이 더 와서 숫자가 늘어났다. 역시 그로서리에 가서 다시 꼬리뼈를 좀 달라고 하니 전과 비슷한 양을 내어 주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좀 더 많이 줄 수 없겠냐고 물었더니 butcher가 하는 말이“너희 개가 강아지를 낳았느냐고 묻더라는 것이다.” 그 질문을 받은 유학생은 대강 얼버무려 대답을 했단다.
소꼬리뼈를 주고받으면서 butcher와 유학생은 서로 다른 그림을 생각의 캔버스에 그리고 있었을 게다. 받아가는 유학생은 이제 꼬리곰탕을 맛있게 먹으며 즐겁게 고향 이야기를 주고받을 동료유학생들의 모습을 그렸을 것인가 하면, 내어주는 butcher는 꼬리뼈를 받아 물고 꼬리를 흔들며 신나하는 강아지의 모습을 그렸을 것이다.
이렇게도 다른 생각이 이제는 서로 가까워져 하나가 된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소꼬리뼈도 그로서리에서 제법 비싼 값을 매겨 파는 것을 보니 그 수요가 매우 증가했고 사람들이 즐겨먹는다 것을 다 알게 된 것이 분명하다. 미국의 문화는 이민자들이 가지고 들어오는 다양한 문화로 인하여 계속 변화하고 있다. 이민자들이 미국화 되기도 하고, 미국이 세계화 되고 있는 양면성의 변화가 계속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 크리스천이 세상에 나가 살 때에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세상의 문화와 가치관은 분명히 기독교의 그것들과 다르다. 예를 들면, 세상은 서로 높아지고 섬김을 받으려는 위주인 반면, 기독교 신앙은 먼저 낮아져서 남을 섬기는 것을 귀한 가치로 여긴다. 그렇기에 자신이 희생하면서까지 남에게 선과 사랑을 베푸는 크리스천의 행동은 의심과 오해를 살 때도 있다. 자신에게 익숙한 가치관과 문화 속에서 서로 다른 그림을 생각으로 그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진실이 깨달아지고 생각이 가까워지며 새로운 하나의 가치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제는 통상적인 값이 매겨 져서 소꼬리뼈가 판매되고 있듯이.
문제는 어느 쪽으로 값이 매겨지는가 하는 것이다. 세상문화와 가치관으로 기울어 질 때에 신앙인도 교회도 세속화되는 것이고, 기독교 신앙적인 것으로 하나가 되어 질 때에는 복음화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기독교 문화선교는 바로 이러한 면에서 매우 민감하게 펼쳐져 나가야 한다.
꼭 거창한 문화선교를 앞세우지 않아도,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민감성을 가지고 삶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9)
소꼬리뼈를 주고받으면서 butcher와 유학생은 서로 다른 그림을 생각의 캔버스에 그리고 있었을 게다. 받아가는 유학생은 이제 꼬리곰탕을 맛있게 먹으며 즐겁게 고향 이야기를 주고받을 동료유학생들의 모습을 그렸을 것인가 하면, 내어주는 butcher는 꼬리뼈를 받아 물고 꼬리를 흔들며 신나하는 강아지의 모습을 그렸을 것이다.
이렇게도 다른 생각이 이제는 서로 가까워져 하나가 된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소꼬리뼈도 그로서리에서 제법 비싼 값을 매겨 파는 것을 보니 그 수요가 매우 증가했고 사람들이 즐겨먹는다 것을 다 알게 된 것이 분명하다. 미국의 문화는 이민자들이 가지고 들어오는 다양한 문화로 인하여 계속 변화하고 있다. 이민자들이 미국화 되기도 하고, 미국이 세계화 되고 있는 양면성의 변화가 계속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 크리스천이 세상에 나가 살 때에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세상의 문화와 가치관은 분명히 기독교의 그것들과 다르다. 예를 들면, 세상은 서로 높아지고 섬김을 받으려는 위주인 반면, 기독교 신앙은 먼저 낮아져서 남을 섬기는 것을 귀한 가치로 여긴다. 그렇기에 자신이 희생하면서까지 남에게 선과 사랑을 베푸는 크리스천의 행동은 의심과 오해를 살 때도 있다. 자신에게 익숙한 가치관과 문화 속에서 서로 다른 그림을 생각으로 그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진실이 깨달아지고 생각이 가까워지며 새로운 하나의 가치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제는 통상적인 값이 매겨 져서 소꼬리뼈가 판매되고 있듯이.
문제는 어느 쪽으로 값이 매겨지는가 하는 것이다. 세상문화와 가치관으로 기울어 질 때에 신앙인도 교회도 세속화되는 것이고, 기독교 신앙적인 것으로 하나가 되어 질 때에는 복음화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기독교 문화선교는 바로 이러한 면에서 매우 민감하게 펼쳐져 나가야 한다.
꼭 거창한 문화선교를 앞세우지 않아도,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민감성을 가지고 삶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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