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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 영적대각성연합집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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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 영적대각성연합집회 | |
‘1907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 영적대각성연합집회’가 24일(일) 오후 7시부터 리틀넥에 있는 아르메니안 소사이어티에서 열렸다.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의 역사 신학 교수(현 예일대학교 객원교수)인 박용규 목사는 다니엘서 9장 18-19절을 본문으로 하여, 1907년에 있었던 평양대부흥운동의 역사와 의의에 관하여 설명했다. 박 목사는 “평양대부흥운동은 강력한 성령의 역사였으며, 100년 전 평양에서 있었던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오늘밤 뉴욕에서 일어나기를 원한다”고 축원했다.
특히, 박 목사는 "그 동안 한국교회는 성령의 역사와 부흥의 역사를 성품의 변화가 아닌 은사위주로만 설명한 경향이 있었다. 성품의 변화 없이는 진정으로 성령충만했다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회개가 일어나고 성령이 충만케 되면 삶이 변하게 되어 있다. 1907년 당시 평양은 거짓과 음란과 술수가 가득한 도시였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가 계속되자 그 도시가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릴 정도로 성스러운 도시로 변했다. 기성신자들이 먼저 은혜를 받아야 한다. 그래서 그들의 삶이 변해야 사회가 변할 수 있다."라고 전하며 '이 시대에 꼭 필요한 것은 회개와 부흥'임을 강조했다.
이날의 집회는 지금까지 있어 왔었던 부흥 집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진행되었다. 집회 때마다 의례껏 등장하는 개회사도, 축사도 없었다. 사회자도 없었다. 신예슬 양이 다니엘서 9장 18절-19절을 봉독함으로써 이 날의 집회는 막이 올랐다. 성경봉독이 끝나자 뉴욕장로교회 청년부 찬양팀의 수준 높은 찬양이 30분 동안 계속되었다. 이어서 등장한 박용규 목사는 평양대부흥운동을 주제로 하여 성령의 역사에 관하여 말씀을 증거해 나갔다. 박 목사가 이날 증거한 말씀의 요지는 아래와 같다.
“’우리는 매우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권능 가운데 임하셨습니다. 장대현교회에서 모인 지난 집회는 최초의 실제적인 성령의 현시였습니다. 우리 중 아무도 지금까지 이전에 그 같은 것을 경험하지 못했으며, 우리가 웨일즈, 인도 등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에 대해 읽었지만, 이번 장대현교회의 성령의 역사는 우리가 지금까지 읽었던 그 어떤 것도 능가할 것입니다. -1907년 1월 15일 George McCune’
100년 전 성령의 역사가 촉발이 되었던 장대현교회의 역사는 1866년 제너랄 셔먼호를 타고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조선에 입국한데서부터 시작한다.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 선교사로부터 시작한다. 토마스선교사는 영국의 하노버 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영국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중국으로 떠난다. 하지만 선교를 시작하려는 그 때에 아내 캐롤라인(Caroline Godfrey)이 세상을 떠나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중국현지의 런던선교회 총무와 의견이 맞지 않아 마찰이 생기자 그는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청국의 해상세관에서 통역관으로 취직한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소속의 한 선교사의 충고와 격려로 다시 선교에 대한 비젼을 재충전할 수 있었고 그 이후 한국선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국으로 갈 기회를 찾던 중에 한 미국상선의 ! 통역겸 안내자로 승선하여 대동강을 따라 평양을 향하게 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동강 어귀 양각도 근처에서 군졸과 관민들에 의해 제너랄 셔먼호가 불타게 되자 겨우 물속에서 헤엄쳐 나온 토마스 선교사는 기다리고 있던 병졸 박춘권에게 살해되었다. 26살의 짧은 나이였다. 하지만 “순교는 교회의 씨앗”이라는 터툴리안의 말처럼 그의 순교를 통해 많은 이들이 회심하게 되었다. 살해되는 순간 토마스 선교사는 박춘권에게 성경을 전해주었는데 그는 그 성경을 읽고 회심하여 안주교회 영사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셔먼호의 불타는 광경을 목격한 이들 가운데 12세 된 최치량은 토마스가 주는 세권의 성경을 받고 보관하고 있다가 겁에 질려 박영식에게 주었는데, 그는 성경책을 자기의 집의 벽지로 발랐다. 벽에 붙은 성경을 읽다가 박영식은 회심하게 되었고 그의 집은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예배당이 되었다. 그 널다리골 예배당이 바로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났던 장대현교회의 전신이다.
1907년 1월 2일부터 15일까지 장대현교회에 있었던 성령의 역사는 이미 그 전에 발생하였던 원산부흥운동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청일전쟁 이후 개성과 평양을 중심으로 북부지역에서 영적 각성 움직임이 일고 있을 때 1903년 8월 원산에서도 영적 각성이 일어났다. 부흥운동의 출발은 두 명의 여자 선교사가 부흥을 달라고 종종 모여 함께 기도했던 것에서부터 출발하였다. 원산을 거점으로 선교사역하던 감리교 소속 화이트(M. C. White)와 캐나다 장로교 소속 메컬리(Louise Hoard McCully)가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8월 24일부터 30일까지 하디를 주 강사로 하여 한 주간 기도회를 가졌는데 하디는 놀라운 영적각성을 경험하게 되었다. 하디는 선교사들과 자신이 시무하는 교회 한국인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교만, 심령의 강팍함, 그리고 믿음의 부족,” 등 자신의 죄악을 낱낱? ?털어놓으며 눈물로 참회하고 회개하였던 것이다. 그가 은혜를 체험한 후 그의 성품과 태도는 변화되기 시작하였고 그의 메시지는 많은 동역자들과 회중들을 감동시키게 된다. 1906년 8월 평양의 선교사들이 원산의 캐나다 선교사 하디(R. A. Hardie)를 강사로 초청하였을 때 그가 전한 메시지의 일부이다. “아무리 높은 이상도 영적인 힘이 없다면 수행하기 어렵다. 기억하라. 이러한 영적인 힘은 계속적인 기도로만 얻어질 수 있다. 우리의 체력이 날마다 음식물을 섭취함으로써 유지되는 것같이 우리의 영적인 강건함도 날마다 기도를 통해서만이 유지될 수 있다. 이때 우리의 목적은 인간의 영광으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으로 그 초점이 바뀌어 진다.” 하디의 메시지를 들었던 장대현교회 담임목사 이길함은 설교를 받아서 그대로 교회 제직들에게 전하였고 제직들은 큰 은혜를 받게 되었다. 이 기도회가 한국전역을 휩쓸었던 원산부흥운동을 태동시킨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1906년 8월 하디의 인도로 진행된 평양선교사 사경회를 통해 부흥운동의 기운이 평양으로 확산되었고, 이어 그 해 가을 남감리교 선교사 저딘(Gerdine)에 의해 남장로교의 선교지 삼남지방 목포에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평양시내 선교사들과 감리교인들과 장로교인들은 연합하여 곧 개최될 예정인 장로교인의 남자 사경회와 그 후에 개최될 감리교인의 도 사경회를 위해 열심히 기도했다. 이렇게 해서 크리스마스 다음날부터 정오 기도회가 시작되었고, 2주 동안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평안남도 도 사경회 기간 동안에도 계속해서 열렸다. 사경회와 연결된 저녁집회는 1500명 이상이 참석한 가운데 1월 6일부터 장대현교회에서 시작되었는데 선교사와 한국인 지도자들이 번갈아 가며 저녁집회를 인도를 맡았다. 14일 저녁집회서부터 부흥의 기운이 터져 나왔다. 그날 저녁 윌! 리엄 헌트(William Hunt) 선교사의 설교가 있는 후 그레함 리(Graham Lee 이길함) 선교사가 모임 회중에게 통성기도를 요청하자 모인 회중 가운데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 것이다. 통회와 흐느낌과 기도 속에 8시에 시작한 그 날 저녁 모임은 새벽 2시까지 무려 6시간이나 계속되었다.
15일 집회는 전날의 전도집회와 똑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길선주 장로의 설교가 있은 후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집으로 돌려보내 거의 600여 명의 사람들만 예배실에 남았다. 길선주가 회개와 고백을 촉구하자 “시내산의 섬광”이 그들 위에 임했으며, 그곳에 모인 이들은 아무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피할 수 없었다. 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무시무시한 죄의 공포가 우리 위에 임했다.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마치 심판 날에 심판주 앞에 서 있는 죄인처럼 공포와 두려움으로 견딜 수 없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 앞에 자기 내면에 깊숙이 감추어 두었던 죄악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여인은 청일전쟁의 발발로 아이를 등에 업고 피난을 하다 무거운 아이를 업은 채 피난할 수 없어 아이의 머리를 나무에 부딪쳐 살해한 다음 도망한 것을 탄식하며 회개하였다. 계속해서 터져 나오는 회개의 물결은 새벽 2시까지 지속되었다.
교회사에 나타난 놀라운 성령의 역사는 말씀을 통해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그것을 회개할 때 시작되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한복음15:7). 이 구절에서 의미하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곧 말씀이며 그의 말씀으로 우리의 심령에 내주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는 말씀과 함께한다. 성령의 역사가 타나나는 곳마다 회개와 통회의 역사가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정기적인 기도(새벽기도)와 통성기도를 통해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 있으며, 성령의 충만함은 신비스러운 현상이 아니라 성품의 변화를 가져온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언급한 성령의 열매들은 모두가 성품에 관한 것들이다. 우리한국교회는 좋은 전통을 지니고 있다. 새벽기도와 통성기도가 살아있는 한 성! 령의 충만함은 계속 부어질 것이다.
장대현교회의 사경회는 집회로 끝나버리지 않고 계속 부흥운동의 불을 집히는 시발점이 되었다. 평양의 교회들과 미션스쿨로 그 불길은 확산되었고, 다시 주변지역으로, 주변지역에서 다시 전국으로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 뿐만 아니라 부흥운동은 영적 갱생을 통해 한국교회를 정화시키고, 죄의식을 더 강화시켰으며 윤리적인 면에서도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교회를 끌어 올렸다. 특별히 부흥운동이 개인적인 영적 갱신운동으로 그치지 않고 교육열, 금연금주운동, 우상숭배에서의 해방, 여성의 지위향상, 결혼 및 세계관의 변화 등 사회개혁으로 이어졌다.
부흥운동이 가져다 준 큰 선물 중에 하나는 한국교회가 급성장함에 따라 자연히 선교사역이 놀랍게 확장되었다는 사실이다. 북장로교의 경우 1908년 22명의 새로운 선교사들이 보강되었고, 1909년에는 14명이 보강되었다.
또한 원산대부흥운동과 평양대부흥운동은 전도열을 고취시켰고 그 결과 한국교회에 놀라운 성장을 가져다주었다.”
2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 날의 집회장에는 300명 이상의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이 참석하였다. 뉴욕과 뉴저지는 물론 멀리 필라델피아에서 달려온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은 3시간 반 동안 계속된 집회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단 한 사람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박 목사의 설교가 끝나고 통성기도들이 이어졌다. 박 목사의 선도로 시작된 기도는 1) 이민교회가 거짓, 분열, 탐욕에 무너진 자신의 황폐한 현실을 깨닫도록(조문찬 목사 인도), 2) 먼저 영적 지도자들이 죄악을 자각하고 진심으로 통회하도록(황의찬 목사), 3)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세속가치를 추구하며 사는 것을 뉘우치도록(우종현 목사), 4) 내 자신보다는 교회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도록(현영갑 목사), 5) 다가올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복음의 증인으로 주님께 충성하여 살아가도록(황석산 목사) 등의 제목으로 참석자 모두가 통성으로 기도했으며, 박용규 목사의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기도는 반드시 응답된다.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자”는 인도에 따라 모든 참석자들이 함께 통성으로 기도한 후에, 박 목사의 축도로 첫날의 집회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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