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는 말
그러나 지금까지 통용되고 있는 일반 찬송을 부르자고 주장하는 자들의 주장에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구약의 시편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직접적으로 노래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구속의 은혜를 입은 성도들로서 당연히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과 및 부활하심을 다른 것들을 노래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서 유럽의 다른 개혁교회들이 하고 있는 부분을 살펴보면 영감된 성경에 나오는 노래들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즉 신약 성경에 나오는 노래들과 음율적인 표현들을 찬양곡으로 사용하고 있다. 개혁교회의 예배음악의 문제는 성령에 의해서 주어진 것으로 찬양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합당한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실지로 구약의 시편도 그리스도께서 주신 말씀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구약의 모든 내용들이 다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음을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에게 명백하게 증거하셨다(누가복음 24장). 그리스도를 나타내지 않은 성경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특히 우리는 시편에서 그리스도의 신성과(시 45:6-히 1:8, 시 110:1-마 22:42-45 비교), 그의 영원한 아들되심(시 2:7-히 1:5 비교), 그의 성육신(시 8:5-히 2:9, 40:7-히 10:5-7 비교), 그의 중보자적인 직임(선지자직: 시 40:9-10, 시 22:22-히 2:12 비교, 제사장직: 시 110:4-히 7:17 비교, 왕직: 시 45:6-히 1:8 비교, 시 110:1-마 22:42-45, 히 1:13 비교), 그의 배반당하심(시 41:9-요 13:18 비교), 그의 고민하심(시 22:2-히 5:7 비교), 그의 심문받으심(시 35:11-마 26:59,60 비교), 그의 거절당하심(시 22:60, 마 27:21-23, 눅 23:18-23 비교), 그의 십자가 죽으심(시 22편, 49편), 그의 장사지내심과 부활하심(시 14:9-11, 행 2:25-31 비교), 그의 승천하심(시 47:5- 행 1:11, 살전 4:16 비교, 시 48:18-엡 4:8-10 비교, 시 24:7-10과 계 5:6-14 비교) 및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시 50:3-4, 98:6,9-마 24:31, 고전 15:52 비교)에 대하여 충분히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칼빈의 주장처럼 예배음악이 ‘선교적인 임무와 교육적 임무’를 지니고 있다고 했듯이 조지 목사 역시 그의 글에서 영감되지 않은 노래들이야말로 가르침과 권면을 위한 교육적 차원에서 볼 때 시편과 견줄 수 없는 것임을 피력하였다.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성경의 권위만큼 강력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음악이 이런 교육적이고 선교적인 유익이 있다고 한다면 성령의 감동으로 영감된 시편만큼 그 목적에 부합한 것이 없는 것이다.
또 하나의 주장은 성도들이 신앙을 고백할 수 있고 그 고백이 노래되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들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에 대하여 감사 찬양의 고백이 필요하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을 노래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시편에 담긴 내용들이 심지어 원수들을 심판해달라는 개인적 탄원까지도(예를 들면, 시 55, 59, 69, 79, 109, 137편 등) 담고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시편을 사용하여 우리들의 감정 표현과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우리가 작사한 것들이 참으로 뛰어나고 놀라운 것일지라도 영감된 말씀으로 찬양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다. 마치 거듭난 성도가 먹고 마시는 것이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며 동일한 음식을 먹고 마신다고 할지라도 거듭나지 못한 자가 하는 것과의 차이가 있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필자가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히브리서 13:15절에 나오는 “찬미의 제사”(thusian ainesews)라는 표현이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찬미의 제사를 항상 우리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히브리서에서 저자는 그리스도의 속죄제사로 말미암아 신약의 성도들은 더 이상 제사를 드리지 않음을 논증한다. 그러나 여전히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남아 있는 제사가 있다면 하나님을 찬미하는 제사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호세아 선지자가 이미 송아지를 잡아 제사하는 대신 우리 입술의 제사를 주님께 드리는 것이다(호 14:2). 칼빈은 이 사실을 그의 주석에서 말하기를 ‘신약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은 우리의 중보자인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정직하게 부를 입술이 없고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자가 없다는 사실을 히브리서 기자가 상기시켜 주고 있으며 그리스도가 없이는 하나님의 찬양을 부르는 일은 더럽혀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칼빈은 찬미의 제사가 다른 제사와 같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율법 아래에서 사용되고 있는 모든 외형적인 것들보다 훨씬 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행위임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아이노스’(ainos)는 신약에서 6번 사용되었는데(마 21:16, 눅 18:43을 포함)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 행위를 말한다. 개인적으로(눅 2:20, 행 3:8), 혹은 제자들이 함께(눅 19:37), 또는 믿음의 공동체가 더불어(계 19:5)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찬양을 의미한다. 이것은 반드시 노래만 의미하지 않고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행위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존 오웬은 이 부분을 강해하면서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를 인하여 복음에 순종하는 삶에는 반드시 감사가 포함되는데 이처럼 순종과 감사를 다 포함하여 찬미의 제사로’ 말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노스’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보다 더 폭넓은 의미로 이해되어진다. 그럴지라도 우리 입술의 열매인 찬미의 제사는 하나님을 높이는 공 예배의 찬양으로서 이해할 때, 앞에서 언급한 존 머레이 교수의 여러 헬라어 단어들과 관련하여 예배 음악에 있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행위는 주로 하나님의 영감된 시편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듯이 여기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행위는 제사라는 단어와 관련하여 반드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는 찬양행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들이 임의로 지어내서 하는 것도 하나님을 경배함에 있어서 사용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는 것보다 이미 무엇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인지 계시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 말씀에 따라 행해지는 찬양이야말로 아름다운 찬양임을 말할 수 있다. 제사는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은 불로 분향하다가 그 자리에서 즉결처분을 받은 아론의 두 아들들(나답과 아비후의 사건, 레 10:1-3)의 경우처럼 비록 우리들이 주님이 합당치 않게 여기는 것들로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당장 징벌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찬양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의 찬양은 무엇보다도 말씀에 근거해야 하며, 반드시 우리의 바른 신학과 신앙을 담고 있는 합당한 가사여야 함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지금 한국의 개혁교회에서 부르고 있는 노래들은 성 삼위 하나님께 합당치 못한 가사들과 적어도 개혁교회의 신학적 입장을 대변하지 못하는 노래들이 쉽게 불려지고 있는 것에 대하여 깊이 탄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실지로 성도들로 하여금 노래하도록 준 시편을 노래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한국교회는 회개와 자성의 시간을 가져야 하며 총회는 속히 시편 찬송가 편찬위원회를 구성하여 개혁교회 예배음악을 신학적이고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교회의 세속화를 방지하고 바른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여야 할 것이다.
감사한 것은 한 출판사(기독지혜사)가 시편 찬송가집을 출판하였고 필자의 교회에서도 스코틀랜드 개혁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시편가를 번역하여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으며 고신측 계통의 군소 교단에 속해 있는 한 교회에서 시편집을 편찬하여 사용하고 있는 등 점차 시편을 불러야 한다는 종교개혁가들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는 자들이 늘어가고 있음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범교단적으로 우리 장로교의 전통적이고 개혁주의적 예배음악의 특색을 살리는 일에 우리 교단만이라도 힘을 기울여줄 것을 간곡히 사모하는 마음에서 본 논고를 준비하였다. 시편편찬 위원회를 구성함에 있어서 음악인들에게만 일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신학자들과 경건한 음악인들이 함께 지혜를 모아 한국교회에서도 시편이 유일한 찬양곡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예배 음악으로 시편이 불려질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기를 소망한다. 현실적으로 시편을 부르고 싶어도 부를 수 없는 상황에서 온 교회는 이 문제가 속히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며 동시에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중 성 삼위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들을 불러야 한다. 그리고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우리의 입장을 달리하고 있는 가사들은 바르게 고쳐서 부르도록 하는 것이 개혁교회 특색을 살리는 주된 일이라고 본다. 바른 신학과 바른 삶이 예배를 통해서 가르쳐지고 정립되므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영화롭게 하는 성도와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본 논고를 마치고자 한다.
서창원 목사(한국개혁주의설교연구원장, 총신대 신학대학원 교수, 삼양교회 담임)
그러나 지금까지 통용되고 있는 일반 찬송을 부르자고 주장하는 자들의 주장에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구약의 시편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직접적으로 노래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구속의 은혜를 입은 성도들로서 당연히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과 및 부활하심을 다른 것들을 노래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서 유럽의 다른 개혁교회들이 하고 있는 부분을 살펴보면 영감된 성경에 나오는 노래들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즉 신약 성경에 나오는 노래들과 음율적인 표현들을 찬양곡으로 사용하고 있다. 개혁교회의 예배음악의 문제는 성령에 의해서 주어진 것으로 찬양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합당한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실지로 구약의 시편도 그리스도께서 주신 말씀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구약의 모든 내용들이 다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음을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에게 명백하게 증거하셨다(누가복음 24장). 그리스도를 나타내지 않은 성경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특히 우리는 시편에서 그리스도의 신성과(시 45:6-히 1:8, 시 110:1-마 22:42-45 비교), 그의 영원한 아들되심(시 2:7-히 1:5 비교), 그의 성육신(시 8:5-히 2:9, 40:7-히 10:5-7 비교), 그의 중보자적인 직임(선지자직: 시 40:9-10, 시 22:22-히 2:12 비교, 제사장직: 시 110:4-히 7:17 비교, 왕직: 시 45:6-히 1:8 비교, 시 110:1-마 22:42-45, 히 1:13 비교), 그의 배반당하심(시 41:9-요 13:18 비교), 그의 고민하심(시 22:2-히 5:7 비교), 그의 심문받으심(시 35:11-마 26:59,60 비교), 그의 거절당하심(시 22:60, 마 27:21-23, 눅 23:18-23 비교), 그의 십자가 죽으심(시 22편, 49편), 그의 장사지내심과 부활하심(시 14:9-11, 행 2:25-31 비교), 그의 승천하심(시 47:5- 행 1:11, 살전 4:16 비교, 시 48:18-엡 4:8-10 비교, 시 24:7-10과 계 5:6-14 비교) 및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시 50:3-4, 98:6,9-마 24:31, 고전 15:52 비교)에 대하여 충분히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칼빈의 주장처럼 예배음악이 ‘선교적인 임무와 교육적 임무’를 지니고 있다고 했듯이 조지 목사 역시 그의 글에서 영감되지 않은 노래들이야말로 가르침과 권면을 위한 교육적 차원에서 볼 때 시편과 견줄 수 없는 것임을 피력하였다.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성경의 권위만큼 강력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음악이 이런 교육적이고 선교적인 유익이 있다고 한다면 성령의 감동으로 영감된 시편만큼 그 목적에 부합한 것이 없는 것이다.
또 하나의 주장은 성도들이 신앙을 고백할 수 있고 그 고백이 노래되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들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에 대하여 감사 찬양의 고백이 필요하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을 노래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시편에 담긴 내용들이 심지어 원수들을 심판해달라는 개인적 탄원까지도(예를 들면, 시 55, 59, 69, 79, 109, 137편 등) 담고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시편을 사용하여 우리들의 감정 표현과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우리가 작사한 것들이 참으로 뛰어나고 놀라운 것일지라도 영감된 말씀으로 찬양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다. 마치 거듭난 성도가 먹고 마시는 것이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며 동일한 음식을 먹고 마신다고 할지라도 거듭나지 못한 자가 하는 것과의 차이가 있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필자가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히브리서 13:15절에 나오는 “찬미의 제사”(thusian ainesews)라는 표현이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찬미의 제사를 항상 우리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히브리서에서 저자는 그리스도의 속죄제사로 말미암아 신약의 성도들은 더 이상 제사를 드리지 않음을 논증한다. 그러나 여전히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남아 있는 제사가 있다면 하나님을 찬미하는 제사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호세아 선지자가 이미 송아지를 잡아 제사하는 대신 우리 입술의 제사를 주님께 드리는 것이다(호 14:2). 칼빈은 이 사실을 그의 주석에서 말하기를 ‘신약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은 우리의 중보자인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정직하게 부를 입술이 없고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자가 없다는 사실을 히브리서 기자가 상기시켜 주고 있으며 그리스도가 없이는 하나님의 찬양을 부르는 일은 더럽혀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칼빈은 찬미의 제사가 다른 제사와 같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율법 아래에서 사용되고 있는 모든 외형적인 것들보다 훨씬 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행위임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아이노스’(ainos)는 신약에서 6번 사용되었는데(마 21:16, 눅 18:43을 포함)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 행위를 말한다. 개인적으로(눅 2:20, 행 3:8), 혹은 제자들이 함께(눅 19:37), 또는 믿음의 공동체가 더불어(계 19:5)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찬양을 의미한다. 이것은 반드시 노래만 의미하지 않고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행위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존 오웬은 이 부분을 강해하면서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를 인하여 복음에 순종하는 삶에는 반드시 감사가 포함되는데 이처럼 순종과 감사를 다 포함하여 찬미의 제사로’ 말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노스’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보다 더 폭넓은 의미로 이해되어진다. 그럴지라도 우리 입술의 열매인 찬미의 제사는 하나님을 높이는 공 예배의 찬양으로서 이해할 때, 앞에서 언급한 존 머레이 교수의 여러 헬라어 단어들과 관련하여 예배 음악에 있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행위는 주로 하나님의 영감된 시편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듯이 여기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행위는 제사라는 단어와 관련하여 반드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는 찬양행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들이 임의로 지어내서 하는 것도 하나님을 경배함에 있어서 사용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는 것보다 이미 무엇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인지 계시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 말씀에 따라 행해지는 찬양이야말로 아름다운 찬양임을 말할 수 있다. 제사는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은 불로 분향하다가 그 자리에서 즉결처분을 받은 아론의 두 아들들(나답과 아비후의 사건, 레 10:1-3)의 경우처럼 비록 우리들이 주님이 합당치 않게 여기는 것들로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당장 징벌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찬양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의 찬양은 무엇보다도 말씀에 근거해야 하며, 반드시 우리의 바른 신학과 신앙을 담고 있는 합당한 가사여야 함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지금 한국의 개혁교회에서 부르고 있는 노래들은 성 삼위 하나님께 합당치 못한 가사들과 적어도 개혁교회의 신학적 입장을 대변하지 못하는 노래들이 쉽게 불려지고 있는 것에 대하여 깊이 탄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실지로 성도들로 하여금 노래하도록 준 시편을 노래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한국교회는 회개와 자성의 시간을 가져야 하며 총회는 속히 시편 찬송가 편찬위원회를 구성하여 개혁교회 예배음악을 신학적이고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교회의 세속화를 방지하고 바른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여야 할 것이다.
감사한 것은 한 출판사(기독지혜사)가 시편 찬송가집을 출판하였고 필자의 교회에서도 스코틀랜드 개혁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시편가를 번역하여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으며 고신측 계통의 군소 교단에 속해 있는 한 교회에서 시편집을 편찬하여 사용하고 있는 등 점차 시편을 불러야 한다는 종교개혁가들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는 자들이 늘어가고 있음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범교단적으로 우리 장로교의 전통적이고 개혁주의적 예배음악의 특색을 살리는 일에 우리 교단만이라도 힘을 기울여줄 것을 간곡히 사모하는 마음에서 본 논고를 준비하였다. 시편편찬 위원회를 구성함에 있어서 음악인들에게만 일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신학자들과 경건한 음악인들이 함께 지혜를 모아 한국교회에서도 시편이 유일한 찬양곡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예배 음악으로 시편이 불려질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기를 소망한다. 현실적으로 시편을 부르고 싶어도 부를 수 없는 상황에서 온 교회는 이 문제가 속히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며 동시에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중 성 삼위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들을 불러야 한다. 그리고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우리의 입장을 달리하고 있는 가사들은 바르게 고쳐서 부르도록 하는 것이 개혁교회 특색을 살리는 주된 일이라고 본다. 바른 신학과 바른 삶이 예배를 통해서 가르쳐지고 정립되므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영화롭게 하는 성도와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본 논고를 마치고자 한다.
서창원 목사(한국개혁주의설교연구원장, 총신대 신학대학원 교수, 삼양교회 담임)
© 2020 Christianitydaily.com All rights reserved. Do not reproduce without permissi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