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자 가장 중요한 사건이며, 지금까지도 우리의 존재양식을 규정하고 있는 6.25전란에 대해서 국내외 많은 연구들이 여러 분야에 걸쳐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기독교와 관련된 연구는 그다지 많지 않으며, 특히 역사학계의 전문적인 연구는 아직까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쟁과 기독교' 라는 주제의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학술 심포지엄에서, 김승태 연구실장의 말이다. 김 실장은 여러자료들을 토대로 6.25전란기 기독교계의 포로선교에 대해서 시(時)론적으로 정리및 발표를 진행했다.
그의 발표에 따르면, 6.25전란 과정에서 공산군측 포로는 1950년 7월부터 발생하기 시작했는데, 그 해 9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유엔군의 북진으로 급격히 포로 수가 증가하여 1950년 말 경에는 포로수가 135,202명에 이르렀다.
또한 전란의 전 기간에 유엔군측이 획득한 포로의 총 수는 171,494 명에 이르는데, 이 포로들은 전적으로 미군이 한국군 경비병의 도움을 받아 부산, 거제도 등의 포로수용소에서 관리하였다.
김 실장은 "유엔군측은 포로들에 대해 제네바협정의 규정이 허용되는 한도 내에서 수용소 건설과 유지에 필요한 작업 교육을 시켰으며, 엽합국총사령부 민간정보교육국이 맡아서 했던 포로교육이 중공군의 참전과 유엔군의 후퇴로 1개월 만에 중단되기도 했지만 1952년부터 재개되었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이 민간정보교육국에서 실시한 포로교육은 기획단계에서부터 반공교육의 일환으로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이었고, 포로수용소 당국도 기독교 선교에 많은 편의를 제공했다. 그러나 기독교가 포로교육의 정규 교과로 편성된 것 같지는 않다" 며 "포로선교는 과외 활동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포로선교는 포로들 가운데 기독교 신자나 전직 목회자 등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시작되었으나, 민간이 신분의 미군 군목들이 한국인 목회자들의 지원을 받아 포로선교를 담당함으로써 활기를 띠었다"라며 "이들은 반공포로 석방운동을 펴 1952년 여름 민간인 억류자 석방과 1953년 6월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을 이끌어 내기도 하였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아울러 "이들은 적극적인 선교 활동으로 많은 성과들을 거두었으나, 한편으로는 반공포로와 찬공포로들 사이의 갈등을 증폭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며 "이것은 이들의 포로선교 활동이 순수한 기독교 복음 전파나 포로들의 종교적 복지 내지 서비스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만이 아니라, 고도의 심리전적 이데올로기적 의도가 재표된 정치적 행위로도 해석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전쟁과 기독교' 라는 주제의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학술 심포지엄에서, 김승태 연구실장의 말이다. 김 실장은 여러자료들을 토대로 6.25전란기 기독교계의 포로선교에 대해서 시(時)론적으로 정리및 발표를 진행했다.
그의 발표에 따르면, 6.25전란 과정에서 공산군측 포로는 1950년 7월부터 발생하기 시작했는데, 그 해 9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유엔군의 북진으로 급격히 포로 수가 증가하여 1950년 말 경에는 포로수가 135,202명에 이르렀다.
또한 전란의 전 기간에 유엔군측이 획득한 포로의 총 수는 171,494 명에 이르는데, 이 포로들은 전적으로 미군이 한국군 경비병의 도움을 받아 부산, 거제도 등의 포로수용소에서 관리하였다.
김 실장은 "유엔군측은 포로들에 대해 제네바협정의 규정이 허용되는 한도 내에서 수용소 건설과 유지에 필요한 작업 교육을 시켰으며, 엽합국총사령부 민간정보교육국이 맡아서 했던 포로교육이 중공군의 참전과 유엔군의 후퇴로 1개월 만에 중단되기도 했지만 1952년부터 재개되었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이 민간정보교육국에서 실시한 포로교육은 기획단계에서부터 반공교육의 일환으로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이었고, 포로수용소 당국도 기독교 선교에 많은 편의를 제공했다. 그러나 기독교가 포로교육의 정규 교과로 편성된 것 같지는 않다" 며 "포로선교는 과외 활동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포로선교는 포로들 가운데 기독교 신자나 전직 목회자 등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시작되었으나, 민간이 신분의 미군 군목들이 한국인 목회자들의 지원을 받아 포로선교를 담당함으로써 활기를 띠었다"라며 "이들은 반공포로 석방운동을 펴 1952년 여름 민간인 억류자 석방과 1953년 6월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을 이끌어 내기도 하였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아울러 "이들은 적극적인 선교 활동으로 많은 성과들을 거두었으나, 한편으로는 반공포로와 찬공포로들 사이의 갈등을 증폭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며 "이것은 이들의 포로선교 활동이 순수한 기독교 복음 전파나 포로들의 종교적 복지 내지 서비스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만이 아니라, 고도의 심리전적 이데올로기적 의도가 재표된 정치적 행위로도 해석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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