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주기도문이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에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시고"가 들어 있다. 일용할 양식은 하루에 필요한 먹을 것과 마실 것이다. 이 해석은 다양할 수 있다. 단순히 문자적으로 하루치 양식을 구하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신 후에 바로 이어서 주신 교훈이 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마6:31)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 하셨다. 예수님은 공중의 새를 하나님이 기르시고, 들의 백합화를 하나님이 입히시는 것을 예로 들며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하물며 하나님이 너희를 먹이고 입히시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셨다.
주기도문에 나오는 일용할 양식을 '하루치 먹고 마실 것'으로만 해석하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상충된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속에 하루의 양식을 구하라는 것을 넘어 더 깊은 의미가 있을 것 같다는 기대를 갖게 된다. 우리는 성찬식에 참여한다. 예수님의 살을 기념하는 떡을 떼며, 예수님의 피를 기념하는 잔을 나누는 성찬에 주기적으로 참여한다. 이 성찬식은 예수님이 친히 제정하신 것이다. "또 떡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22:19-20) 성찬식에도 '먹고 마시는것'이 등장한다.이 의미를 좀 더 알기 위해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 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6:33,35,47-51,53-55) 이 말씀들 가운데 '먹고 마시는것"이 나오고 이 '먹고 마시는 것"과 대구를 이루는것이 '생명'이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먹고 마시는 것'이 곧 '생명'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솔로몬이 찾은 삶에 '먹고 마시는 것'이 등장한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도 '먹고 마시는 것'이 등장한다. 예수님이 제정해 주신 성찬식에도 '먹고 마시는 것'이 등장한다. 이 '먹고 마시고'가 의미하는 것은 단순히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곧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다. '먹고 마시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 솔로몬의 고백은 곧 '생명'이 있는 삶보다 나은 것은 없다는 그의 신앙고백이다. 솔로몬이 생명을 찾은 것이다. 솔로몬이 그동안 그렇게 허무했던 이유는 생명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솔로몬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탄식했던 것이다. 그러던 그가 생명을 찾았고, 하나님의 손에서 생명을 받았다.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렇다면 그동안 솔로몬은 생명이 없었다는 말인가?" 없었다. 솔로몬은 살아 있었지만 그에게는 생명이 없었다. 생명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허전하고 공허했던 것이다. 살아있기는 한데 생명이 없었다.
사람에게 생명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공허하지 않고 허전하지 않다. 그래야 살맛이 나고 사는 의미가 있다. 솔로몬이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았지만 허전하고 공허했던 이유는 그 속에 생명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알았다. 그동안 자신이 왜 방황했는지, 무엇이 최고의 삶인지, 최고의 삶은 생명이 있는 삶이라는 것을 알았다. 첨단 지식으로 연구해도 찾지 못한, 소유를 아무리 늘려도 찾지 못한, 아내를 아무리 많이 두어도 찾지 못한 최고의 삶이 생명 안에 있었다. 생명을 찾은 솔로몬이 외쳤다. "생명이 있는 삶이 최고다! 이보다 나은 삶이 없다."이제 그는 더 이상 방황하지 않아도 된다. 최고의 삶을 찾았으니 최고의 삶을 누리면 된다. 최고의 행복을 찾았으니 최고의 행복을 누리면 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흙으로 지으신 후 그의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 하나님의 생명을 주셨다는 말이다. 그러나 다른 생물체는 호흡을 주셔서 살아있게 하셨다. 살아있는 것에서는 다른 생물체와 사람이 같지만 생명의 유무에선 다르다.
살아있는 것과 생명을 동일시하는 기존 관념 때문에 구분이 쉽지 않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5:12) 이 말씀을 보면 아들이 있는 자가 나오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가 나온다. 둘 다 살아 있지만 한 쪽은 생명이 있고 한 쪽은 생명이 없다. 생명이 있으면서 살아 있는 사람이 있고 생명이 없으면서 살아 있는 사람이 있다. 성경은 살아 있으나 생명이 없는 사람을 죽었다고 말하고 생명이 있으면서 살아 있는 사람을 살았다고 말한다. 육신의 양식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생명이 없는 사람이고 영의 양식을 위해 사는 사람은 생명이 있는 사람이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광야 40년 동안 만나를 통해 연단하신 것이다. 지금도 육신의 양식 문제는 영의 양식 문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