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의 무슬림 국가인 인도네시아에도 교회가 있고 신학교가 있다. 인도네시아 신학교 학생들의 필수적인 졸업 조건에는 교회를 세워야하는 의무 조건이 있다. 문제는 교회를 세워야하는 지역이 지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반드시 이슬람 공동체 안에 세워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새로 예수를 믿고 셰례를 받은 교인이 30명이 넘어야 개척을 인정받을 수 있다. 졸업식에서 학위증을 받는 졸업생들의 표정에서 나타나는 사명에 대한 결연함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깊은 감동을 받게 한다. 모두가 교회 개척이라는 졸업 요건을 충족시킨 용사들이기 때문이다. 드물지 않게 졸업생 중에 무슬림 박해자들의 손에 목숨을 잃은 사람이 있을 때가 있다. 순교한 졸업생을 위한 기도 시간은 졸업식 전체를 통털어 가장 엄숙한 순간이 된다. 어느 때보다 비장한 결단을 다지는 졸업식이 된다. 졸업하는 학생들은 많은 간증이 있기 마련이다. '라덴'이라는 학생의 간증이다.
"저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는 싸움꾼이었습니다. 각종 호신술에 능통해서 상대를 제압하는 데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예수라는 이름조차 들어 본 적이 없는 마을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됐습니다. 어느 집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 때마침 그 마을 주술사가 들이닥쳤습니다. 주술사가 거칠게 시비를 걸며 한판 승부를 가리자고 도전해 왔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뛰어나가 단숨에 때려눕히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문고리를 잡는 순간 주님이 싸우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친히 나서시겠다는 겁니다. 의자를 갖다 놓고 주술사 정면에 앉으며 말했습니다.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겠소. 하나님이 날 대신하여 싸우실 거요."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라덴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 주술사가 대꾸를 하려고 입을 달싹하는 순간, 갑자기 숨이 막히면서 고통스러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갑작스런 사태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주술사는 곧 죽고 말았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그 장면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라덴은 고백했다. "난생처음 당하는 일이라 어찌할바를 몰라 당황하고 있는데 '지금이야말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그날 수많은 마을 사람들이 예수 믿기로 결단했습니다." 라덴의 이야기는 2천년 전,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선포할 때마다 일어났던 사건들을 상기시켜 준다. 눈먼 이들이 보았고, 다리를 절던 이들이 멀쩡하게 걸었으며, 죽었던 이들이 벌떡 일어났다. 예수님 이름에 의해서 악한 영들이 쫓겨나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이 나타났다. 그로부터 2천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도 주님의 이름에 담긴 권세는 여전히 막강하다.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와 능력에 대해서 어리석게 따질 것이 아니라 그 권능을 믿을 것이냐 안 믿을 것이냐가 관건일 뿐이다. 문제는 현대 문명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들이 중요한 고비마다 주님 대신 자신의 능력을 신뢰해야 할 것만 같은 유혹을 받는다는 점이다.
제임스 애덤스는 1931년에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면서 "남자든 여자든 누구나 타고난 재능을 충만하게 실현할 수 있으며, 출생 신분 지위에 상관없이 사람 됨 자체로서 대접받는것"이라고 정의했다. 큰 꿈을 꾸면서 열심히 노력한다는 것은 장려할 만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메리칸 드림을 통해서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위험스러운 가정 가운데 하나가 '인간의 가장 큰 자산은 재능'이라는 생각이다. 아메리칸 드림은 자신을 믿고 의지해서 무언가를 이루어 간다는 개념을 무척이나 소중하게 생각하게 하며 그런 사고에 매료되게 한다. 하지만 복음의 우선순위는 다르다. 복음은 자신을 죽이고 하나님을 믿으며 그분의 권능을 의지하라고 요구한다. 인간이란 하나님을 떠나 독자적으로 의미있는 일을 할 능력이 전혀 없는 존재임을 복음을 통해 직면하게 하시는 것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는 말씀이 이를 잘 증명한다.
더 중요한 것은 제 힘으로 목표를 달성하게 되면 누구든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게 되는 아메리칸 드림의 치명적 함정이다. 인간의 존재와 능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간의 자기 영광 추구가 하나님의 영광과 충돌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아메리칸 드림과 정반대로, 하나님은 실제로 자신의 무능력함을 자랑하는 자들을 기뻐하신다. 일부러 그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도우심 외에는 기댈 것이 없는 막다른 상황으로 이끌어 가기도 하신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주님은 인간으로서는 동원해 본적이 없는, 아니 상상조차 하지 못한 특별한 방식으로 당신의 능력을 확연히 보여 주신다. 결과적으로 그분의 이름이 높이 드러나게 하시는 것이다.(고후12:7-9) 성경에 나타나는 수많은 기적의 목적이 무엇인가? 오직 하나님이 그 모든 역사를 일으키셨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일하신다. 절박하게 주님의 권능을 구할 수 밖에 없는 자리로 몰아넣은 뒤에 필요를 채워 주심으로써 그분의 위대하심을 나타내신다.
초대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사도행전을 보면 먼저 몇 안되는 겁 많은 제자들이 다락방에 옹기종기 모였다. 다들 하나님의 권능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다. 누구하나 변변한 인물이 없었다. 이것이 기독교 최초의 성도들의 모습이었다. 그 사람들은 무엇을 했는가? 그들은 아무 대책없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행1:14) 하나님이 임하시길 간구했다. 주님이 힘을 주시지 않으면 그 무엇도 성취할 수 없음을 확실히 알았다.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대신 십자가에 못박는 길을 가야한다. 오직 하나님이 행하시고 이루시기를 간절히 구하고 의지하는 자세를 끝까지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재주를 의지하지 말고 성령의 능력을 절박하게 구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 기도의 무릎을 꿇어야 한다. 무릎이 일어나면 내가 하게 되고 무릎을 꿇면 하나님이 하신다. 자신을 버리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능력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