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드 그랜트 지음/홍종락 옮김/믿음의 글들/1권 324면, 2권 304면/각권 8,800원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마르틴 루터는 종교개혁의 화신으로 유명하다. 그는 16세기 유럽의 부패하고 타락한 카톨릭 교회의 모습에 롬1:17절을 들어 비난의 일침을 가한다.
'오직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ergo sola gratia jusificat)
루터가 종교개혁자의 자리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소설화 해 담은 본서는 그 인간 루터의 성정이 어떠했는가 가히 짐작하게 해준다. 또 책이 소설화 된 특성상 진지하면서도 드라마틱한 전개가 재미와 흥미를 돋운다.
지극히 감정적이고 때로는 욱 하는 격한 성격에다 외설적인 언사조차 거침없이 내뱉던 사람 마르틴 루터.
인간적으로 연약한 점이 없지 않으나 오늘날 많은 이들이 루터를 존경하는 이유는 루터가 격렬한 퐁풍의 한복판에서도 "오로지 성서주의,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 앞의 순종"을 고집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 책에서 루터는 "지금 제 2의 종교개혁이 필요하다"며, "교회갱신과 예배회복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이들이 정의의 깃발을 드는데 주춤거리지 말 것을 촉구했다.
책을 읽으면 하나님을 향한 절대믿음과 지조를 전수시켜주는 루터의 뜨거운 하나님 사랑을 느낄 수 있는데 아마도 이 의를 향한 분노가 95개조 반박문을 쓰게 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소설 마르틴 루터>에 따르면, 루터가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했을때 직업이 광부였던 아버지와의 사이에 불화가 일어났다. 또 설상가상으로 "화형에 처하라.사단이다"라고 취급 받을 정도로 세상의 교회에서도 버림을 받았다.
그러나 루터는 이런 어려움에 쉽게 동요하지 않고 용감무쌍했으며 성서에 입각한 자기신념을 철저하게 붙든다.물론 그런 그의 확고한 자기신념이란 하나님의 은총에 뿌리를 둔 것이라고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책에서 루터는 재능이 많아 동료들에게 시기질투도 받았고 여러 가지로 미운 구석도 많았다.왜냐하면 그의 성격 자체가 좋게 말하면 개성적이라고 해야겠지만, 유별난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는 친구보다 적을 더 많이 만들 수 있네...솔직히 마르틴을 참아 줄 수 없을 때가 있어.가끔씩 그는 논쟁을 멈춰야 할 때를 몰라." -본문 중에서
똑같이 컵에 남겨진 물을 보고 한 사람은 "물이 반밖에 안남았네"라는 말을 하고 다른 사람은 "물이 반이나 남았네"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루터의 그칠 수 없는 논쟁 ,그의 표독한 성정"을 하나님은 어떻게 해석하실까?
아마도 하나님은 그의 갸륵한 피흘림과 싸움에 위로받으셨고 눈물을 흘리셨을 것이다. 또 보이지는 않지만 루터의 외로운 싸움 가운데 쉼없이 동참하셨을 것....또다른 해석은 독자들에게 맡기겠다.
실제로 루터의 반박과 논쟁은 기존의 세력에 도전해 어떤 승리감을 맛보려 하는 수준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종교개혁이란 중세적 옛질서의 잘못된 일부를 시정하려는 일면적 개혁운동이 아니라 옛 질서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려했던 운동이다.
"종교개혁은 단순히 종교의 차원에 국한된 변화가 아니라 전사회적 변혁으로서의 성격을 지닌 역사적 사건임을 고려하면서 이 책을 읽으라" 고 권하고 싶다.
루터는 "행위와 공로로 인한 구원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도전하는 것"임을 분명히 했으며 모든 구원의 주권이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있는 것임을 단호히 주장했다.
아무리 루터가 반박과 논쟁 줄기차게 잘 하는 은사를 가졌던 자라도 하나님 앞에서 만큼은 반박과 논쟁의 입을 다물 줄 알았다.왜냐하면 루터는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두려워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마르틴은 처음 집례한 미사에서 성체를 거양했던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다리가 후들거렸고 재판정의 눈길에 온몸이 뚫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를 가장 두렵게 한 것은 권력자들이 아니었다.이 자리에서 내린 결정에 대해 그들 모두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지게 될것이었다.그것이 그를 너무나 두렵게 만들었다.
그 결정은 이 방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제국 내 모든 백성들의 영원한 운명에 영향을 끼칠 것이기 때문이었다"
루터가 이단이라 취급받고 화형선고를 받을 위기에 처했던 그 조마 조마한 순간...루터는 종교 개혁의 기본원리를 성서에서 찾는다. 그리고 자신의 주장이 이 성경에서 조금이라도 위배되지 않기 위해 떨며 기도한다.
그런데 이렇게 두려움 많던 루터가 죽음의 위기 앞에서 침착하고 평온했으니...두려움에 대한 루터의 이 아이러니칼한 이중적 태도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본문은 다음 루터의 말 속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죽음은 더 이상 두렵지 않네.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랑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앗아갔네.하지만 죽음으로 가는 길, 십자가 자체도 두렵지 않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지.
불 일까 도끼 일까..그러나 유스투스, 주님께서는 이 아름다운 시편말씀을 통해 내 발이 평탄한 데 섰음을 상기시켜 주셨네.이제는 안다네. 내가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 받을 때, 나는 실족하지도 넘어지지도 않을 걸세. 그분의 은혜, 그분의 성령의 능력으로.
마르틴은 잠시 말을 멈추고 펼친 성경위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그분의 거룩한 말씀의 권세로 나는 설 것일세"
-본문 중에서
아마도 루터는 (롬1:17)오직 의인은 믿음으로(by faith) 말미암아 살리라'의 대표성구가 있는 로마서에 그 손을 얹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필자는 본서를 통해 '나의 미지근함'과 '입에는 독을 머금고 겉은 화려한 외식의 삶'을 회개했다.또한 이 시대의 많은 기독인들도 "루터의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을 마땅히 당신들의 삶에서 드러내라"고 충고하고 싶은 의분이 솟구쳐 올랐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끝날 미지근한 것은 다 토해내버리겠다고"하는 주님의 말씀이 참으로 무섭다.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차든지 덥든지,우리 신앙은 분명해져야 하며 그러할 때 이 시대의 암흑,모든 죄의 세력이 궁극적으로 거두어 질 수 있다.
죄가 또 어둠이 저절로 없어지길 기다리는 기독인들의 안일한 신앙, '누군가 종교의 개혁을 일으키겠지' 하는 방관자적인 신앙의 태도는 진정한 기독인의 모습이 아니다.기독인들을 루터처럼 불의를 보면 참지 않고 타협하지 않아야 하는 법.
루터처럼 사람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이가 점점 늘어난다면 , 세상은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죽음을 불사르도록 하나님께 헌신하는 자 단 사람만 있다면, 그의 희생은 결코 희생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교회 예배당에 일주일에 한 번 가서 헌금 엄청 하고 회개기도 열심히 하면 ,또 열심히 주일에 일하면 구원받는다"는 공로주의적 신앙
또 이것을 이용해 초대교회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기업화된 교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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